Struggled  for  labor  reforms,  human  rights  and  other  progressive  causes

To retrace Byeong Jin & Gyeong Seok's voyage of labor movement in the 1980s and 1990s

    

한국민주화 운동사

한국민주화 운동사 (The Dynamic Development of Korean Democracy - English Version)

6월 민주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위의 자료들은 모두 한국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한국의 진보
   - 제 1부 : 공장으로 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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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 인민노련, 혁명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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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부 : 혁명의 퇴장, 떠난 자와 남은 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이다.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진압했는데, 5월 27일 새벽 2시 탱크와 군인 25,000명을 투입하여 광주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고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 중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 당시 3천여명에 달하는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 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됐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 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도록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 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 박탈, 복종 강요, 지각 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 연행된 사람들은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1997년 대한민국의 대법원에 의해  5·18, 12·12 진압 관련자들이 처벌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한민국의 대법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피고인(신군부)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정호용·이희성·황영시·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들은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만장일치로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유네스코는 이와 함께 광주민주항쟁은 1980년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국가들의 냉전체제를 해제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 5.18 기념재단    

     1984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문지는 광주였다. 교황은 5·18의 상징 장소인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을 돌아 미사 장소였던 광주 무등경기장으로 이동했다. 교황은 ‘용서’라는 주제의 미사를 통해 “광주시민과 같은 특별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6.25 한국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었고, 한국민주화의 피묻은 받침대가 되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당시 대학 1학년, 그리고 2학년에 각각 재학중이던 오경석.유병진에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게 하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더 많은 자료들을 아래 youtube에서 볼 수 있다.

<5.18민주화운동 전남도청 발포 당시 상황>, <전남도청 진압작전>,<5.18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 <가만히 있는 시민들을 공격하는 계엄군>, <푸른 눈의 목격자 04>,<푸른 눈의 목격자 05>,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대검에 가슴찔린 여자에 대한 증언>, <5.18 민주화운동 당시 외신보도와 국내언론보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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