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개발센터
경실련의
문어발식
운동영역
확장
논란
불구
지속가능발전·환경정의
실천
토대
구축

20세기
최대의
회의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가
폐막된
지
5개월
지나
국내에서
특이한
환경운동단체가
하나
탄생한다.
이
단체는
리우회의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
이름부터가
특별했다.
1992
년
11월
14일
창립식을
가진
‘환경개발센터’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의
산하
기구로
출발했다.
여기에는
미묘한
복선이
있다.
경실련이라면
당시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민운동단체였다.
환경개발센터의
출범은
경실련이
환경운동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겠다는
뜻이었고,
이는
리우회의를
기점으로
한국
환경운동에
새로운
흐름을
제공한
큰
물결
가운데
하나였다.
경실련
환경개발센터
출범
‘주목’
1991
년을
뒤흔든
페놀사건은
전국
각지에
강력한
환경운동단체를
태동시킨
기폭제가
됐다.
대구공추협,
마산·창원공추협,
진주
‘남강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등이
페놀사건이
계기가
돼
결성된
지역
환경운동
조직이었다.
환경운동의
지방화는
역으로
전국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었다.
리우회의는
여기에
또
하나의
길을
터주었다.
경실련
환경개발센터의
출범은
환경운동의
보편화,
즉
주류
운동으로의
편입을
의미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경실련의
이런
행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경실련은
이름
그대로
‘경제
정의’를
지향하는
운동
조직이다.
경제
정의를
세우는
일도
어려운데
환경운동까지
하겠다고
하니
주변의
우려나
시비가
따를
수밖에.
환경개발센터
설립을
주도한
유재현
당시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현
명지대
건축도시설계원
교수,
녹색미래
이사장)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처음에는
운동단체나
최열씨
등
환경운동하는
그룹이
‘왜
경실련이
환경운동을
하느냐,
경제
정의
하면
되지’라고
했다.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론은
명확했다.
투쟁적인
환경운동만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하는
대안사회를
만드는
것이
UNCED의
정신이다,
그러면
모든
사회,
모든
단체가
다
참여해서
(실천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재현과
경실련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게
되기까지에는
간단치
않은
사연과
과정이
숨어
있다.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
영역
확장을
도마
위에
올리던
경실련이
스스로
운동
영역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이들이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UNCED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먼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서경석
당시
경실련
사무총장(목사,
현
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이다.
서경석은
서울대
공대
운동권의
뿌리가
된
산업사회연구회(이하
산사연)의
창립자이자
새문안교회를
근거지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교회운동권의
핵이었다.
즉,
산사연과
새문안교회의
운동권
인맥이
경실련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는
얘기다.
눈총
받았던
유재현의
놀라운
시도
|
 |
|
‘환경개발센터’
설립을
주도한
유재현
당시
경제정의연구소장과
연구원(활동가)으로서
‘환경정의’
로의
조직
전환을
이끈
서왕진·오성규(왼쪽부터).
|
유
재현은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출신으로,
대학
시절
산사연과
새문안교회
양쪽과
연을
맺었다.
서경석(66학번)·유재현(69학번)·신철영(70학번)으로
이어진
초창기
경실련
사무총장들이
모두
산사연-새문안교회
인맥이다.
여느
운동권처럼
좌파적
색채가
다분했던
이들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것은
미국
유학에서였다.
유재현의
기억을
다시
살려보면….
“학
생운동을
할
때야
다
같이
했지만
그
후의
진로에
대해서는
각자
고민이
많았다.
마침
서
목사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가게
되어
거기서
함께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세계의
시장경제와
시민사회를
경험한
그룹은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
돌아왔다.
이제
좌파와
손을
끊고
합법적인
운동을
하자….
그래서
서
목사는
기사연
원장으로
국내에
복귀해
거기서
스스로
‘파문’을
당한
것이다.”
유재현은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울산대
교수를
거쳐
한샘주거환경연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장으로
상근하게
된
사연은
엉뚱한
면이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매우
‘낭만적인’
동기에서
비롯됐다.
“졸업하고
운동을
다
끊었지만
서
목사의
제의를
받고
다시
한
번
시작해볼
마음이
생겼다.
내
친구들이
감옥에
유독
많이
갔다.
산사연
동기,
교회
친구….
기독교적
종교운동의
메카가
새문안교회였다.
나는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이고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낭만적인
동기였다.”
경제정의연구소장으로
상근하게
된
그는
활동
영역을
넓혀
연구소
안에
환경연구부를
신설했다.
이때가
리우회의
직전인
1992년
4월
14일이었다(환경개발센터,
경실련의
환경운동,
1994년).
그가
‘경제
정의를
연구’하는
것과
무관한
것처럼
보였던
‘환경
연구’를
시작한
까닭이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리우회의가
열리기
전
해인
1991년부터
준비회의에
몇
차례
갔다.
뉴욕에서
회의할
때
보니까
충격적이었다.
뉴욕에
살았어도
지속가능발전이라는
개념을
잘
몰랐다.
이름은
들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일주일
동안
영문
자료를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21세기
패러다임이
새로
만들어지는구나’라고….”
그는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이
주도한
UNCED
한국위원회에
참여해
국제위원장을
맡았다.
4월
23일부터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CED 4차
준비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리우회의에도
그를
포함해
원경선(현
환경정의
이사장)·이진아(현
환경정의
정책위원)
등
4명이
참여했다.
유재현의
예견대로
21세기
국가사회의
중심
의제가
된
ESSD(Environmentally Sound & Sustainable
Development,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의
연원은
멀게는
1992년
로마클럽
보고서,
가깝게는
1987년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위원회’(WCED)
보고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리우회의에서
채택된
‘의제21’에서였다.
리우회의에서
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움켜쥔
그가
돌아와서
할
일은
분명했다.
UNCED의
이름
그대로
환경개발센터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시선을
무릅쓰고
환경운동에
뛰어든
유재현은
또
한
가지
놀라운
시도를
행동으로
옮긴다.
환경개발센터를
법인화하는
것이었다.
운동단체의
사단법인
등록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어떻게
운동을
정부에
등록하고
하느냐”는
게
운동하던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였다.
환경개발센터는
1998년
환경정의시민연대로
명칭을
바꾼
뒤
그
다음해에
경실련으로부터
아예
독립하게
된다.
2004년에는
다시
환경정의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연히
환경정의의
조직
형태는
사단법인이다.
환경운동연합·녹색연합
등
대부분의
메이저
환경운동단체가
지금도
미등록
단체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들
두
조직은
모단체는
임의단체로
남아
있는
대신
산하기구인
시민환경연구소·녹색사회연구소
등은
사단법인화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등록
단체는
후원자에
대한
세금공제
등
각종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정부의
연구
용역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모단체든
산하기구든
법인으로
등록돼
있으면
큰
차이가
없지만
당시로서는
운동단체의
법인화는
운동권
내부의
큰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조직
구성도
“그게
무슨
운동단체냐”고
외부에서
시비를
걸
정도로
전문가
일색이었다.
이사장은
원경선
한삶회공동체
이사장,
대표는
권태준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였고
김명자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현
열린우리당
의원,
전
환경부
장관),
신의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현
연세대
학부대학장)
등
각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연구위원에
포진했다.
그는
서경석
경실련
사무총장
등과
함께
이사로
참여했다.
이진아·유병진
등이
운동성
불어
넣어
|
 |
|
1992년
환경개발센터
창립
기념식(위)과
1999년
환경정의시민연대의
그린벨트
해제
반대
고공시위.
단체명이
풍기는
전문성과
운동성의
무게중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운
동단체라고
보기
어려운
조직
형태와
구조,
지향하는
바는
창립
선언문에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환경문제의
근원을
‘인간이
지녀왔던
가치관이나
문화
자체’에
있다고
못
박고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찾는
문화운동이라는
토대
위에서
환경운동을
펴나갈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창립
선언문의
일부를
보면….
“현단계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경제정책이
가져올
장기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
환경관리라는
개념에
입각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며
그것의
실행을
위해
하나의
시민단체로서
국내외
타
시민단체와
연대하고
정부
및
기업과의
대화를
통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는….”(환경정의시민연대,
환경정의
10년사,
2002년)
환경
파괴의
원인을
‘인간’이라는
넓은
범위로
설정하고
‘대안
제시’
‘정부
및
기업과의
대화’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는
공추련
등
주류
환경운동
진영의
시각이나
입장과는
분명
큰
괴리가
있었다.
뜻은
좋지만
자칫
실효성
없는
담론
생산에
그칠
수도
있었던
조직이
그
기본
정신을
살려가며
굳건한
운동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경제개발센터는
초기에
전문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정책
제안과
갈등
중재,
국제
연대
등에
나서는
한편
그린벨트
해제
반대,
내린천댐
반대
등
‘활동’
부분에서도
성과를
올렸다.
새로운
흐름은
전문성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다.
머리를
뒷받침할
손발이
있어야
한다.
환경개발센터가
운동조직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던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오성규(현
환경정의
사무처장)가
환경개발센터에
들어간
것은
공추련의
주축인
1980년대
반공해운동권의
환경운동
입문
과정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세월의
격차만큼
운동
환경이
바뀐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까.
그
역시
1980년대
말
‘PD의
소굴’로
불리던
성균관대
운동권이었다.
기계공학과
86학번인
그는
ND에서
분화한
PD계열
중에서도
여명(신새벽)
그룹에
속했다.
1991년
학교
조직과
경기지역
일부의
책임자로서
성균관대에서
결행된
전노협
출범을
‘사수’할
임무를
맡았던
그는
이
일로
인해
도망다니다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
있을
때만
해도
그는
장래
‘현장’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대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YS정부가
들어서서
‘비합’(비합법)조직이
합법화되고
현장에
들어갔던
인자들도
빠져나오는
분위기였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할
여유를
갖기
위해
학교에
복적해
다니던
중에
덜컥
취직이
되고
말았다.
한
개인이
뛰어난
활동가가
되기까지에는
‘운명의
사슬’과
같은
특별한
인연이
개입된
예가
많지만
오성규의
경우는
그
사연이
묘하다.
그는
현대중공업
해외기술영업부에서
근무했다.
개발도상국에
중장비를
파는
것이
업무였다.
1년
쯤
되었을까.
비합조직에
있을
때
선배였던
서왕진(현
환경정의연구소
부소장)으로부터
‘콜’이
왔다.
환
경개발센터에는
전문가
그룹
외에도
활동가들이
있었다.
사무국장
이진아,
사업부장
유병진(미국
이민),
연구원
서왕진·김종익(현
목포경실련
사무국장)
등이다.
바로
이들이
자칫
손발
없는
연구단체가
될
뻔했던
환경개발센터에
운동성을
불어넣은
주인공이다.
“직
장생활을
하는
동안
늘
불안하고
고민스러웠다.
계속
샐러리맨으로
살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서왕진
선배가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같이
하자고
권유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제안이었다.
곧바로
직장을
정리했다.
내가
해외에
중장비를
하도
팔아먹어
그걸
보상하는
차원에서
환경운동을
하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성규의
최근
회고다.
환경개발센터는
‘개발’에
기여하다
‘환경’
일을
하게
된
그를
위한
작명이었을까.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직장생활을
접고
비합운동과는
거리가
먼
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진보적
사회
진출’에
대한
정리가
이미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몸담았던
비합조직에서
상당수가
경실련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역시
환경개발센터에
들어가기
전에
환경운동연합에도
줄을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이
반공해운동마저
주변부
운동으로
치부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환경운동에서
운동성과
전문성은
수레의
양
바퀴처럼
같이
돌아가는
것임은
지나온
환경운동사가
잘
말해준다.
운동성이
강했던
공추련
진영이
끊임없이
전문성을
보강했던
것처럼
전문성을
표방한
환경개발센터는
운동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조직
변화를
꾀하게
된다.
환경개발센터
시절부터
젊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제기된
경실련으로부터의
독립
요구가
그
한
단면이다.

환경개발센터 실립 당시의 이사장 원경선, 대표 권태준, 이사 서경석,
연구위원 김명자(왼쪽부터).
환경·개발
함께
추구한
환경개발센터
환
경운동의
패러다임이
‘반공해’에서
‘환경’으로
바뀌고
환경운동의
저변이
크게
확장되면서
가장
필요해진
것이
이런
수요를
충족해줄
활동가였다.
환경개발센터는
경실련의
산하기구이기
때문에
그
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활동가
수를
늘리더라도
다른
부서와
형평을
맞추어야
했다.
유재현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우리
때도
독립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나는
통합해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통합
모델로
발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립
주장은
T/O
문제,
활동
제약
등을
이유로
활동가들이
선호했다.
경실련의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부담도
덜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젊은
활동가
그룹은
‘액티브한’
운동에
매력을
느끼게
마련이다.
환경개발센터의
운동은
이들에게
매우
정적이었다.
그것이
일선
활동가나
젊은
회원들에게는
불만
요인이었다.
이번에는
오성규의
얘기를
들어보면….
“군
대에
갔다
와서
학교에
다닐
때
안양경실련
회원으로
활동했다.
‘너무
정적인
것
아니냐’는
게
젊은
활동가들의
불만이었다.
예를
들면
경실련
과학기술위원회는
당시
핵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다.
나중에
내가
한전
앞
시위에
참여해
학생운동
이후
처음으로
닭장차에
실려간
일이
있었다.
경실련에서는
‘왜
불법집회에
참석해서
그러느냐’고
했다.
여러
기관과의
충돌이나
현실적인
제약으로
액티브하지
못했던
게….”
실제로
환경개발센터는
환경정의시민연대로
이름을
바꿔
경실련에서
독립하면서
현장활동이
크게
강화됐다.
이념도
‘환경개발’에서
‘환경정의’로
약간
왼쪽(?)으로
튼
느낌을
준다.
그린벨트
살리기
운동,
용인
난개발
반대
운동,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등이
이
시기에
주력했던
활동이다.
리우회의에서
확립된
‘지속가능발전’의
이념을
적극
수용해
‘환경’과
‘개발’을
함께
추구한
환경개발센터는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환경운동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환경개발센터는
경실련
지방
조직을
기반으로
‘지방의제(Local
Agenda) 21’의
실천을
주도,
과연
리우회의의
‘모범생’다운
면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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