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박기동의
시에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한
월북
동요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였다.
순천
벌교
지역에
널리
불리웠다가
빨치산이
된
사람들이
불러
금지곡이
되었던
노래다.
*
芙蓉山
*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홀로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다음의
글은
2007년
오마이뉴스
기사
김동욱의
‘요절한
여동생을
그리다
노래가
된
‘부용산’>에서
인용>>>
원래 ‘부용산’은
1947년
목포
항도여자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던
안성현
선생이
자신의
제자
여학생이
요절하자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든
노래다.
그러나
부용산의
가사는
그
몇
해
전에
먼저
나온
시(詩)였다.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박기동
선생이
고향
벌교에서
어린
나이에
숨진
자신의
여동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시(詩)가
바로 ‘부용산’이다.
그러던
것이
한국전쟁
당시
작곡자인
안성현씨가
월북하고,
한때
빨치산들이
많이
불렀던
노래라
해서
그때부터 ‘부용산’은
금지곡
아닌
금지곡
취급을
당했다.
그
후 ‘부용산’은
당연히 ‘구전가요’로만
남아
호남지방에서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어찌
보면 ‘부용산’은
근대판 ‘제망매가(祭亡妹歌=신라시대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추모하며
지은 10구체
향가)’에
다름
아니었으나
당시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낳은 ‘숨겨진
노래’가
돼
버린
셈이다.
부용산은
월북
시인이
숨어
부른 ‘제망매가’
호남고속도로
송광사나들목을
나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주암호를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면서 27번
국도를
따라 1시간
가량
달리자
벌교
초입이다.
벌교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홍교
시계탑과
그
왼쪽의 ‘홍교(虹橋=무지개
다리)’가
눈에
띈다.
홍교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벌교
사투리로 ‘횡곗다리’라는
이름으로
잘
묘사돼
있다.
이
홍교
위에서
시계탑
방향으로
마을
뒤편에
보이는
산이
바로
부용산이다.
따라서
기실
부용산은, ‘웅장함’이라던가
‘빼어난
아름다움’과
같은
수식어와는
거리가
먼,
그저
마을의
작은
뒷동산일
뿐이다.
실제로
지금은
산
정상
부근에
체육공원이
있어
벌교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
구전가요 ‘부용산’의
가사는
원래 1절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1999년
5월
목포
뉴프린스
레스토랑(지금도
이
레스토랑이
있는
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에서
열린
소프라노
송광선씨
초청
음악회에서 ‘부용산’이
2절까지
불려졌다.
송광선씨가
음악회를
준비하면서 ‘부용산’의
2절을
아쉬워했고,
당시
한국일보의
주선으로
지난 1993년
호주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작시자
박기동
선생이 2절을
지어
보냈다고
한다(1999년
6월
3일
한국일보
김성우
칼럼
참조했음).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오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해방
후
우리나라
근현대를
관통해온
큰
물결은
이데올로기의
대하(大河)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지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어느
누구도
이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3~4년
동안
구전가요 ‘부용산’은
‘작시
박기동ㆍ작곡
안성현’으로
다시
태어나
원래의
제망매가(祭亡妹歌),
혹은
제망제가(祭亡弟歌)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