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는 이야기  [List] 
Nov 24,  2011 | 고향, 구룡포 방문
   

포항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
 
1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한 달가량 고향에 머물렀던 것이 1983년 봄.
끊임없이 주위를 배회하던 시골형사는 피곤했고,
구룡포 어머님은 징역독을 빼야한다고 날 데리고 산엘 함께 올라 토종꿀을 벌집채로 사다가 날 먹이셨다.
여자동창 한 이는 남들 방해받지 않는 곳으로 날 이끌어 "걔는 이제 시집갔으니 잘 살기를 바래라"라고 말했다.
83년 봄 이후 28년이 지나 찾은 고향이다.
 
고향친구 이병열이가 마중을 나왔다.
73년 고향을 떠나고 못 만났으니 38년 만이다.
친구는 오후 근무 들어가기 전에 우리 가족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한 접시, 한 접시 모두 직접 장만한, 그 수고와 정성이 상을 가득채운 최고의 음식이었다.
가자미와 조기에 알러지가 있는 석재는 이날 그 생선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우리의 결론은 싱싱한 생선이라는 것이었다!
집사람은 너무 먹어 숨을 쉬기도 어렵게 즐거웠는데, 친구가 그랬다 "참고 더 묵으소!" 
우리는 그 때를 생각하며 지금도 즐겁고 기뻐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함께 사진을 찍다.
(아들 석재, 집주인 이병열, 나, 장인회, 서인만)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인만이에게 부탁을 했다, 구룡포를 좀 안내해 달라고.
너무 변해버린 고향땅이기에 예전 우리 집에 있던 곳, 바닷가 어판장, 학교다니던 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했다.
흔쾌히 시간을 내준 친구,
넉넉하게 시간을 잡는다고는 했지만,
구룡포 선산에 들렀다 다시 포항엘 나와 누님들과 저녁을 먹자면 아무래도 시간에 쫒긴다.
포항에서 구룡포 가는 길 중간에 인만이 친구는 몇 곳을 들러주면서, 지난 30여년의 구룡포의 흐름과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 앞날에 대해 온 정성을 다해 얘기를 해주었다.
고맙구나, 친구야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
(옛 미성당 자리에서 뜨레주르 빵집을 하는 김도연(개명을 했다는데 난 자꾸만 옛 이름을 불렀다), 옛 읍장집 터에서 돈까스집을 하는 정상도, 고등학교 졸업이래 한 직장 현대제철에 다니고 있는 안익태, 유치원부터 친구 박영숙, 박해술, 나, 서인만)
도연이는 갈 때마다 빵이며 커피를 그냥 주어서 도연이 집사람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선산 고조할아버지 묘지 앞의 석재.
석재는 아버지의 고향이 처음이다. 유치원도 다니기 전 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살고 거기서 자손을 내리기 시작할 이 아이가 언제 다시 아빠의 고향을 와 볼 것이며, 언제 다시 선산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것인가?
어머님 살아 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손주의 얼굴을 뵈 드리는 것, 석재가 할머니의 얼굴을 기억하고 할머니의 정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던 한국방문이었다.
 
고향 친구들이 우리가 함께 다니던 중학교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해가 저물어 가는 그 교정에서 상도가 아들 석재에게 말머리를 푼다.
"너거 아부지가 말이다, 중학교 댕길 때 수학시간이았는데
선생님이 '이 문제 풀 사람 손 들아 바라' 안캤나.
근데 아무도 손을 안 드이까네
선생님이 '유병지이, 어딨노? 나와 가 이거 풀아바라' 안 캤나.
..............."

 상도의 정 넘치는 경상도 사투리를 석재는 다 알아들었을까?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이 중년이 되어 만났다.
 
초등학교 교정(구룡포 초등학교)에서.
진빵과 국수를 팔던 학교앞 가게는 여전히 문을 열고 있었다.
 
저녁 함께 하기로 한 누님들은 하염없이 늦어지는 막내동생을 기다리다 지치셨단다.
셋째 누님집에서 저녁을 먹고 모두 큰 누님 집으로 갔다. 누님들은 그 늦은 시간에도 알타리 김치를 담그신다고 분주하셨고, 소금에 절이는 동안 화투를 치며 즐거워했다.
나와 오경석은 너무 피곤하여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식탁에 둘러앉은 나, 셋째누님, 조카 은정이, 큰 누님. 앞에 석재
 

오경석은 이번에도 선물을 한아름 받고 입이 함지막하게 벌어졌다.
손재주 많으신 셋째 누님과 은정이가 만든 아기자기하고 예쁜 수공예품들을 한 아름 받고는
모두다 가져갈 거라고 자꾸 자꾸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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