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2020] [List] 
Oct 02, 2020 | 신익성(1588 – 1644)의 가을풍광
          

  (원글주소 : https://cafe.daum.net/back2korea/h29s/3287)


우리 모두 한국을 떠나 다른 곳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지요.
아들아이 포함해서 식구 셋이 전부인 저같은 경우는 설날이나 추석같은 한국의 큰 명절이 되어도
한국의 가족과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것이 그저 다입니다.
 
추석은 음력으로 팔월 보름날, 올해는 그래서 오늘 10월 1일이 추석이었습니다.
추석이라고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부모형제 가족 모두와 오랜 세월 떨어져 살다 나이 육십을 넘겼습니다.
선현들은 이를 생각이 원숙해지는 때라 했지만,
내가 그리 되었나 생각해보면 어림없는 것 같아 웃음이 납니다. 약간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의 글귀 하나를 심심해서 봤습니다.
‘팔월 보름에 강에 배타고 나갔다가 술 생각이 나서 크게 취하도록 마셔보겠다’는 것이 맘에 쏙 들고,
팔월 보름에 썼다하니 계절도 딱 맞는 듯 싶어 적적한 마음이나 달래 보려 했습니다.     
 

 
가을 풍광
 
나그네 우천에서 출발하는데
강이 달빛 따라 골짜기를 뚫었네
평생 낙엽 따라 다니자니
희끗한 머리에 가는 세월 애석하네
개인 날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고
가을 풍광 눈 가득 어여쁘네
초연히 소박한 술상 내어다
비틀거리도록 한 바탕 취하리
 

客自牛川起   객자우천기
江從月峽穿   강종월협천
生涯隨落葉   생애수낙엽
鬢髮惜流年   빈발석류년
霽日傷心麗   제일상심려
秋光滿目姸   추광만목연
翛然成小飮   소연성소음
一醉任欹顚   일취임기전


 
<영 심심하신 분들이나 읽으시라고, 가을빛 1>

지금부터 딱 402년 전에 임금의 사위였던 신익성(1588 – 1644)이란 사람이 쓴 글입니다. 숙부와 함께 1618년 8월 보름에 소양강으로 배를 타고 나갔다고 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싯귀가 괜히 마음에 들어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임금의 사위, 부마라고?
그러면 평생 한량으로 탱자탱자 놀고먹어도 되잖아?
마누라가 공주. 뭐 어쨌든 임금의 딸이니 이쁜 건 당연할 거고 왕실인데 돈걱정 없을 거고.
 
근데 이 싯귀가 좀 이상해. 이거 쓸 때 나이를 따져보니 딱 서른 살인데 평생 낙엽 따라 다녔다고 하잖아요.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평생을 가을낙엽 보며 한량으로 놀았다는 것 같은데 뭔 고민이 있다고 나이를 따져보니 겨우 삼십인데 벌써 머리가 희끗하다고? 그 나이에 가는 세월이 애석하다고여? 별 웃기는 인간 다 보겠네.
 
근데 다음 구절은 더 합니다. 뭔가 서글픔과 한이 가득한 인간같은데 거기서 그치질 않습니다. 이 강은 소양강인데 그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강물위로 배를 타고 가면서 그 위로 달빛이 비쳐오자 “강이 달빛 따라 골짜기를 뚫었네”라고 하는 겁니다.
 
왜 이런 말 있잖습니까

“Simply close your eyes and just listen to the music”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가만히 눈을 감고 듣지 않습니까. 싯귀도 그렇지요. 가만히 눈을 감고 천천히 이 글귀를 되내이며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서 그려봅니다, 그러면 가끔은 눈물이 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궁금한게 생기는 겁니다.
처음에는 왕의 사위 부마가 아주 복에 겨워서 음풍농월 지랄을 하며 쓴 싯귀같았는데, 자꾸 뭔가 그런게 아닌 것같다고 잡아 당기는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심심, 시간은 많은데 궁금은 하고 해서 4백년 전인 1618년이면 세상이 도데체 어떻게 돌아가던 때인가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에서는8백만명 쯤 죽어나갔던 전쟁, 종교와 정치체제가 뒤섞였던 종교전쟁이라는 게 시작되어 온 유럽대륙이 난장판이 되고, 중국은 명나라가 저물고 여진족이 청나라를 건국해 나가니 이 대륙도 난장판이고 명을 대국으로 섬기던 조선은 고민이 깊어지고 그 때문에 이 때 이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전쟁도 벌어져 정묘호란, 병자호란이란 치욕도 당하고, 여기 미국은 그 2년 후인 1620년에 청교도들을 실은 메이플라워호가 동쪽끝 Cape Cod에 도착하는 세상이더라고요.
    
조선을 조금 더 보니 그 한 세대 전이었던 1592년 일본이 쳐들어온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1597년에는 일본이 재침공해서 정유재란이 벌어져  6-7년을 전쟁에 시달렸던 통에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게 ‘선조’라고 하는 한 임금 밑에서 겪습니다.  이 임금 ‘선조’는 제가 몇년 전 한국의 한려수도를 지나며 임진왜란이란 전쟁통에 국왕의 피란과 또 이순신장군과 관련한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조금 말하기도 했단 국왕입니다.
 
이 임금 '선조'는 정실부인인 왕비가 임진왜란 통에 얻은 병으로 죽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후궁중의 한 명인 인빈 김씨만 데리고 도망가는데 왕비는 그래서 남편인 선조와 떨어져 평안도 해주로 떠납니다.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는 4년동안 왕비는 해주에 홀로 떨어져 있었고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에도 선조는 또 인빈 김씨만 데리고 도망가고 왕비는 세자인 광해군과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왕비는 1600년 46세의 나이로 피난지에서 얻은 질병(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여하튼 이 임금 선조는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두번째 정실을 맞이하는데 그 분이 우리가 텔레비전 드라마같은 데서 하도 많이 다뤄서 그 이름도 익숙한 ‘인목대비’입니다. 물론 어느 왕 못지않게 후궁은 줄줄이 많았고 그 후궁 중에 한 명으로 부터 나온 아들이  광해군입니다.
그러니까 1618년 이 시를 쓸 때 ‘신익성’이란 사람은 당시 왕이었던 ‘선조’의 사위입니다. 그리고 다음 대 왕이 된 광해군의 처남입니다. 광해군과 신익성의 부인은 배다른 오누이. 선조의 후궁 중에 공빈 김씨가 낳은 아들이 광해군이고, 선조의 또다른 후궁 인빈 김씨가 낳은 딸 중의 하나인 ‘정숙옹주’가 이 글의 저자 신익성의 부인입니다. 그러니까 선조임금이 왜란으로 도망갈 때 마다 왕비는 버리고 가면서도 꼭 데리고 다녔다는 그 후궁 인빈 김씨가 낳은 딸, 즉 왕의 후궁이 낳은 딸이라서 '옹주'라는 칭호를 받는 정숙옹주입니다. 
 
복잡하다고요? 그렇죠
선조는 16살에 왕이 되어 2명의 정실부인(왕후)와 6명의 후궁을 두었고 이 8명의 부인으로부터 아들 11, 딸 14을 두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정실부인인 왕비가 낳은 자식은 아들이면 대군, 딸이면 공주라 했고 후궁이 낳은 자식은 아들이면 그냥 ‘군’, 딸은 ‘옹주’라 했습니다. 선조는 나이 쉰다섯에 정실왕비로부터는 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영창대군입니다. 이때 아들을 생산한 정실왕비 '인목왕후'는 스물세살, 그리고 다음 대 보위로 오를 세자였던 광해군은 서른 두살이었습니다. 그리고 후궁으로 부터는 13명의 아들 즉 ‘군’을 두었습니다. 광해군은 이 그냥 ‘군’중의 한 명이었고요.   
 
나이 쉰 다섯의 왕이 후궁으로 부터 낳은 자식이 나이 서른 둘의 세자인데 스물 세 살의 두번째 정실 왕비가 적자인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비극이 준비되는 거죠, 그리고 이 영창대군은 광해군이 왕이 된 지 6년이 되던 해에 8살 어린 나이로 참혹한 죽음을 맞습니다. 
 
너무 많다고요?
당대에는 왕자 생산이 왕실의 번성을 가져온다는 게 법도였고,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는 세종대왕은 정부인과의 사이에 8남 2녀, 후궁까지 합치면 무려 18남 4녀, 총 22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이 자식들은 모두 뛰어난 자질을 가졌는데 우리 역사에서 왕의 자리를 두고 피비린내를 불러온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후세에 태조로 불리우는데, 둘째 아들이 다음 왕 ‘정종’이 되지만 겨우 2년쯤 왕을 하다 그냥 다섯째 동생에게 왕위를 줘 버립니다. 이들 왕자들 간에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서로 죽고 죽이는 ‘왕자의 난’이라는게 벌어졌거든요.
 
이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조선의 셋째 임금 태종이  되고, 태종의 셋째 아들이 조선 4대임금 ‘세종’, 즉 우리가 나중에 '세종대왕'으로 부르는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종의 장자가 다음 임금 ‘문종’이 되는데 재위 2년만에 죽자 그 아들, 즉 세종의 손자가 나이 11살에 또 다음 왕 ‘단종’이 됩니다.
 
그런데 세종의 둘째 아들이라서 왕이 되지 못했던 '수양대군'이 왕이 된 자신의 어린 조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한국사람이라면 다 아는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된 수양대군입니다. 한국의 역사드라마의 첫째 소재가 바로 여기 아닙니까, 수양대군이 조카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고, 그 어린 왕을 지키려다 능지처참을 당해 죽는 ‘사육신’이 만고의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그러면서도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피워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사관들은 이 역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합니다. 잠깐 왕을 하다 그만 두어버린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은 사냥하며 놀다가 한번은 왕의 옆에는 늘 존재하는 사관에게 내가 사냥하며 노는 것도 기록되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왕이 그렇게 물었다는 것까지도 역사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심심해서 옛 시 하나 보다가 이 시를 쓴 신익성은 도데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싯귀를 토해냈단 말인가 싶어 뒤적뒤적하다가 여기서 거기에 대해 마구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제가 계속 심심하면 이어서 쓸 텐데 영 심심하신 분들이나 보시라고요

.
 
<영 심심하신 분들이나 읽으시라고, 가을빛 2>

신익성은 서기 1600년, 12살에 선조임금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을 하여 부마가 됩니다. 부마를 선택할 때는 대체로 벼슬이 4-5품 이하 가문 중에서 좋은 인품을 지닌 10대의 아이들 중에서 간택을 했습니다. 3품 이상의 고관은 제외되었고요. 즉 명문의 후예이긴 하지만 부친의 지위가 높지 않은 집의 자식, 혈통과 가문은 좋되 권력과 재산이 없는 집이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외척의 득세를 원하지 않는 왕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익성이 부마로 선택될 때 그의 아버지 신흠은 정3품 예조참의였고, 신익성은 그 집안의 정실부인에게서 난 장남, 적장자였습니다.
‘예조’는 당시의 행정기관 육조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교육부, 외교부, 여성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을 합친 부서의 일을 수행하던 곳인데 현재의 장관인 예조판서, 차관인 예조참판, 그리고 신익성의 아비가 맡고 있던 예조참의, 차관보가 있었습니다.  즉 선조임금은 당시 직제로 정3품 참의(차관보)로 일하던 신흠이란 신하의 첫째아들을 부마로 낙점했다는 말이지요.
장남을 부마로 보내지는 않았던 전례에 비추어 보거나 그의 아비가 정3품의 고위관료였던 점에 비추어 보면 선조임금은 열 두살의 이 아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같습니다.
 
후일 신익성은 "무릇 글씨와 그림에 있어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붓을 종이에 대기만 하면 지극히 정묘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문장이 크고 유창하고 명랑하고 호준했으며 시는 격조가 높고 뛰어나서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할 정도였다 합니다. 나라의 옥책, 보전, 명정, 신판, 지문은 그의 글씨가 열에 일곱, 여덟을 차지했다 하니 선조임금은 크게 될 성싶은 어린 싹을 알아보고 사위로 찍었던 것일까요?  
 
열 두살에 부마가 된 신익성은 별 의미는 없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종1품의 벼슬을 받고 대감이 됩니다.  이게 얼마나 높은 벼슬이냐 하면요, 장관인 판서는 정2품인데 이들 장관 이상의 벼슬에 있어야 ‘대감’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역사 드라마에서는 ‘무슨무슨 대감’이란 말이 너무 흔하게 나와 그저 높은 양반 나부랭이 정도로 생각되지만 실은 한 나라의 장관 이상이 되어야만 들을 수 있는 호칭입니다. 차관과 차관보인 정3품  ‘참판’과 ‘참의’는 ‘영감’으로 불리고 그 밑으로는 그냥 ‘나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나리’라는 호칭조차도 종4품이면 왕의 교지로 임명되는 고급관리였습니다. 요새 한국의 대통령이 고위관료를 임명할 때 청와대에 불러서 임명장을 주는 걸 방송에서 많이 보지 않습니까, '나리'란 그렇게 고위관료란 거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단종복위를 꾀한 성삼문을 잡아다 주리를 트는 고문을 가할 때 성삼문이 왕인 세조를 ‘전하’나 ‘폐하’라 하지 않고 계속 ‘나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일반 서민들에게야 이 ‘나리’라는 명칭이 정4품의 하늘같은 벼슬아치였겠지만, 왕이 들을 때는 자기가 임명하는 관리 중의 제일 하급 관료의 호칭을 써서 계속 자기를 불러대니 수양대군 세조가 얼마나 복장이 터졌겠습니까? 세조가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삼문에게 "이 놈아, 그러면 내가 준 녹봉은 왜 먹었느냐"? 하니 성삼문이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죠? "나리가 주신 녹봉은 한 톨도 안먹고 창고에 그냥 쌓아놓았습니다" 세조가 사람시켜 확인하니 정말로 자기가 준 녹봉은 손도 안대고 쌓아둔 걸 보고는 뭐, 뒤로 넘어질 지경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저 놈의 주리를 더 틀어라’가 되고, 그걸 뻔히 알고, 자기 다리뼈가 박살날 것을 뻔히 알고, 처참히 죽게될 걸 뻔히 알면서도 굴하지 않았으니 그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하지 않습니까. 후대의 사람들이 그를 사육신이라 부르고 오늘날까지 기억합니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검사가 되면 ‘영감’으로 부른다는데, 이 현대 한국의 검사 ‘영감’이라는 호칭이 제게는 조선의 이 ‘나리’보다도 더 높은 정3품 차관보 ‘영감’을 연상하라는 듯, 훔쳐온 듯 들립니다. 한데 그것보다는 늙은이 ‘영감’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든 사람처럼 연륜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영감으로 부른다 하면 듣기도 좋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 열 두살의 아이 신익성은 부마로 간택되고는 졸지에 ‘동양위 대감’으로 불리게 됩니다.  왕의 사위가 되면 ‘위(尉)’라는 관작이 주어지는데 그 집안 성씨의 본관에다가 이 ‘위’라는 직위를 붙여서 부릅니다. 즉 본관이 의성이면 의성위, 경주면 경주위가 됩니다. 열 두살의 신익성은 본관이 동양이어서 ‘동양위’ 대감이 됩니다. 뭐 이런 거죠. 평민이 대감을 못알아 볼 경우에는 수발을 드는 종이 앞에 나와 이렇게 호통을 치는 거죠.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동양위 대감이시다. 예를 갖추지 못할까”, 만난 사람이 지체있는 양반이면 "동양위 대감이십니다" 그러면 다 알아듣지요, ‘위’자가 붙은 대감이니 부마라는 걸요. 더욱이 부마를 선택할 때 나라에 금혼령이 내릴 지경이었으니 어찌 모를 수가 있었을까요.
 
부마가 확정되면 공주나 옹주는 유모와 몸종들을 데리고 하가를 합니다. 공주는 신분이 낮은 양반가의 아들과 혼인을 했기 때문에 ‘아랫사람에게 시집을 간다’라고 하여 ‘하가(下嫁)’라는 표현을 쓴 것이지요. 조선 초기에는 부마가 관직을 제수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7대 세조 임금대를 기점으로 국정운영과정에 참여하거나 행정관리가 될 수 없었고, 9대 왕 성종임금 때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부마의 정치 참여는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지금 얘기되는 선조는 14대 왕입니다. 부마는 신분은 높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고, 즉 벼슬을 할 수도 없고 학문으로 출세할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공주나 옹주가 먼저 세상을 떠나도 재혼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가령 외적이 쳐들어온다든가 반란이 일어난다든가 하면 제일 앞에 칼들고 서서 왕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이 부마였습니다.
 
그래서 왕실의 체면만 손상하지 않으면 어지간한 일은 눈감아 주었고 재주가 뛰어날 경우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외교적 행사에 간판으로 나설 수도 있었고 양반가들과 교유하며 산천유람하고 사는 거지요. 그렇게 그냥 놀고 먹게 해줍니다. ‘귀한 내 딸 잘 보살펴라’면서 땅을 주고 녹봉을 줍니다. 공주나 옹주가 하가할 때는 왕실로부터 받아 나오는 이 땅을 궁방전이라고 합니다. 물론 땅은 사위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딸에게 속합니다. 조선시대 토지의 단위는 ‘결’인데 공주나 옹주가 혼인하여 분가하여 나올 때 왕실로 부터 받는 '결', 즉 땅의 규모는 그 중에서도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달랐지만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요새의 단위인 ‘평’으로 바꾸어 도데체 어느 정도 되는지 알고 싶지만 학자들도 잘 모르고 해서 어렵습니다.
 

그냥 대충 한번 짐작해 보았습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토지의 면적 단위임과 동시에 수확 단위·수세 단위를 표시하는 결부법이란 것이 정립되는데, 이 때의 1결의 실제 면적은 그 땅의 좋고 나쁨에 따라 상등전 1결이 1천 8백평, 중등전 1결이 2천9백평, 하등전 1결은 4천1백평 정도라고 합니다 .
세종이후에는 그 땅의 실제 수확량에 따라 1등전에서 6등전으로 구분하였는데 환산하면 대충 1등전은 2천7백평 정도이고, 6등전은 1만1천평 정도로 보입니다.
여하튼 옹주가 140결의 땅을 받아나왔다고 치면, 이런 계산은 전혀 정확한 것이 아니지만 그냥 감이라도 좀 잡아보려고 환산해보니 (그러니 절대로 저에게 이 계산에 대해 시비걸지 마세요. 저도 하도 궁금해서 그냥 막 해본거지 무슨 학자도 아니고요) 140결이면 140*2000평, 그러면 대충 한 30만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땅이 한 곳에 있는 땅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땅이라고 해도 엄청난 규모입니다. 머리 아픕니다!
 
이 당시의 세상은 토지가 모든 경제활동의 근간입니다. 생산은 토지로 부터 나오고, 내가 이 토지를 얼마나 가지고 있고, 그 토지로부터 얼마만큼의 곡식을 생산하느냐가 부와 사회적 지위결정의 기본이 됩니다. 가령 재산의 수준을 말할 때 일년에 백미 천석을 거둔다....하고, 땅을 살 때도 농지 13결을 백미 70석에 샀다.....뭐 이렇게 말하는 거죠.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시대의 ‘만석꾼’ 집안 최’참판’댁을 배경으로 펼쳐져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국가수입의 원천인 조세부과의 기본이 되는 거고요. 국가가 토지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골머리를 섞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석.만석의 곡식을 거둔다는 큰 부자 천석꾼, 만석꾼이란 말도 여기서 나오고,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며 나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힘이라는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지금도 쓰입니다.  
 
서기 1600년, 12살의 나이로 부마가 되어 동양위 대감이 된 신익성이 스무살이 된 1608년 드디어 광해군이 임금이 됩니다.
두 차례의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라가 그야말로 피폐해졌고, 그 사이에 왕비가 병으로 죽고,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던 임금은 다시 왕비를 얻어 왕자를 생산하고, 후궁의 자식이었지만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며 도망만 치던 임금인 아비를 대신해서 국사를 이끌어 나가던, 당시로서는 영특하고 군주로서의 자질을 보이던 세자 광해군이 임금이 될 때까지 신익성은 할 일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10대였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때는 아마 땅을 넓히는 일도 좀 한 것같습니다.
 
왕의 딸들이 하가할 때 받아 나오는 궁방전은 농민들에게 경작을 시키고 지대를 받습니다, 이를 수조권이라고 합니다. 이 궁방전을 경작하는 농민들은 국가에 조세를 납부할 의무에서 면제되고 군징집도 면제되었습니다. 엄청난 혜택입니다. 더욱이 지대가 적어 자작농들이 일부러 궁방전에 토지를 갖다 바치는 일도 비일비재했지요. 지대는 보통 5할인데, 왕실은 3-4할 정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놀고 먹는데도 돈이 많이 들어가나 봅니다. 하기사 4백년이나 지난 지금 세상에서도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으니 부마들도 늘 돈이 모자라지 않았나 싶습니다. 대감 정도 되면 죽치고 밥이나 축내는 식객들도 적지않았을 것이고 그 식객들의 규모가 또 자기가 가진 힘이기도 했으니 돈은 언제나 더 필요했을 듯합니다.
 
임진왜란 이후였던 이 시기에는 주인없는 땅이 속출했습니다. 경작지였던 토지가 황폐화되어서 버려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주인없는 땅인 무주지나 버려진 토지인 진황지를 궁방전에 넣는 것이 재산을 늘리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는데, 지방 수령이야 부마가 하는 일에 시비를 걸 처지도 아니었고, 왕 또한 자기 딸의 문제이니 대부분 허락합니다. 주인있는 토지를 관과 짜고 무주지라 속이고 주인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를 진황지라 속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군이나 고을에 속한 토지, 아문둔전도 황폐해져 경작할 수 없다 속이고 관에서 빼돌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런 식으로 백성의 원성을 사는 일도 아니니 부마가 궁방전을 늘여 재산을 증식하는 일은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무주지는 개간하면 개간한 사람이 토지의 주인이 되니 양반들이야 기왕에 있는 노복들 좀 데려다가 개간하는 시늉을 해서 그 땅의 소유권을 얻기도 하고, 버려지거나 황페화되긴 했지만 주인이 있는 땅은 적당히 값을 쳐주고 궁방전에 편입시키는 겁니다.  
 
이게 정사의 기록인지 야사인지 모르겠지만 인빈 김씨의 큰 딸 정신옹주는 하가할 때 380결을 받았고, 신익성에게 하가한 셋째 딸 정숙옹주는 140결을 받았다 했으니 언니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땅을 받았던 겁니다.  어리신 동양위 대감께서 그래서 땅 늘리는데 노력을 하셨다 합니다.
 
이 때가 1600년대 초, 궁방전의 면적에는 제한이 없었고 부마들께서 이렇게 재산늘리는 재미가 쏠쏠하여 국고수입이 줄고, 토지제도의 혼란이 가중되고, 백성의 원성이 높아질 정도가 되니 1663년 광해군 3대 후의 임금인 현종때 이 궁방전을 대군·공주는 4백결, 군과 옹주는 250결로 감하여 제한을 두었다 합니다. 그래도 평생을 놀고먹기에 부족함이 없는 재산이지요.
 
이제 스무살을 넘긴 동양위 대감은 뛰어난 자질을 보였지만 아무 생각없이 놀고먹어야 되는 삶을 떠나 격동의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나이 삼십에 머리가 세고
개인 날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고
가을 풍광이 눈 가득 어여삐 느껴지고  
그래서 소박한 술상 앞에 놓고 취하도록 마시고 비틀거리고 싶어지는 삶을 겪습니다.
 
(에고, 옛 선현이 쓴 시 한수 보고 좋기도 하고 그래서 썼다가 마무리는 해야 하니 힘들어져 버렸다. 또 계속입니다.)      




<영 심심하신 분들이 읽으시라고 쓰기 시작했는데.....가을빛 3>

신익성이 배를 타고 소양강으로 들어가 이 시 ‘가을빛’을 지었다고 스스로 기록한 1618년 팔월 보름은 광해군 시절 두 번째의 역모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해, 그 달이다.
 
광해임금 시절 첫 번째의 역모사건은 1613년 그의 재위 5년 째, 선왕의 정비였기에 이제는 대비가 된 인목왕후의 아비 김제남이 역모를 꾀했다 해서 그 아비 김제남을 포함한 인목대비의 세 남자형제들이 죽임을 당했던 사건이다. 선조임금이 죽고 서자로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32살의 광해군이 즉위하지만 인목왕후는 이 때 25살, 그리고 겨우 2살이었던 적장자 영창대군은 자꾸 자라고 있었으니 왕권과 권력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전쟁의 시작이다.
 
결국 대비의 친정은 일곱 살 손자이자 조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올리려 했다는 탄핵을 받아 모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계축옥사’라 한다. 역모에 연루될 경우 여자들은 연좌되지 않고 살아남지만 대부분 노비로 전락한다. 살은 목숨이 죽은 목숨보다 더 고통이고 지옥이고 치욕이다. 하지만 이 일은 대비의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5년간 끝없는 싸움으로 이어진다. ‘역적의 딸이자 역적의 어미가 어찌 대비일 수가 있느냐, 인목대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폐비론과 ‘안된다’는 반대론으로 날을 세고 달을 세고 해를 세고 넘기며 싸우고, 수많은 인물들 특히 대비의 폐출에 참여하지 않거나 반대한 사람들은 탄핵되고 삭탈관직되고 유배가고 귀양가고 그리고 죽임도 당한다.
 
1618년 2월 광해임금 재위 10년, 마침내 광해임금은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가두고 그 아비 김제남을 심지어 부관참시한다. 이 때의 모습이 어떠했냐 하면 당시 집권세력 당파들은 하루 세 번씩 무리를 지어 왕에게 나아가 대비를 폐출하라고 26일간이나 왕을 압박했다 한다. 그 수가 수 백명이라고 하는데, 뭐 얼마나 무리를 지어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떼를 지어 왕 앞에서 26일간 농성을 했다는 말이다.
 
왕으로서는 자신을 받쳐주는 집권당파가 자신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수없는 상소와 탄핵은 빗발쳤을 테니 언로는 이미 장악되었다는 말이고, 그 와중에 자신 스스로가 서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후궁이었던 자신의 어미의 신분격상과도 관련되어 탄핵세력과 적당히 타협하면 굳이 자신에게 불리할 일은 없었던 역모사건이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나라가 절딴나 피폐해져 있어도, 내 집단이 권력을 가지는 것이 먼저고 내 집단의 이익을 손상시키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집단은 모조리 쳐내야 한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비 즉 선왕의 왕비를 쫒아내더라도 그렇다. 지금 내 집단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이익을 지키고 또 더 커진다면 대비의 아비가 역모를 꾸몄든 안꾸몄든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다, 죽이면 된다. 7살난 선왕의 적장자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광해 임금은 폐모론에 처음에는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자신이 세자 시절 '어마 마마'라 부르던 이를 결국 폐모시켜 궁에 가두었고, 대비의 아비도 죽여야 했고, 선왕의 적장자로 7살 배다른 아우도 죽였다.    
 
대비의 친정이 역모사건으로 몰살당하던 해, 스물 다섯의 부마 신익성은 폐모론에 반대하여 그 후 아비 신흠과 함께 도성에서 추방되어 시골로 쫒겨나는데 광해군이 그래도 부마라고 귀양은 허락하지 않았던 덕분이다.  하지만 신익성은 시골서 대죄(待罪)하고 몇 년이 되도록 어명을 기다려야만 했다. 부마의 신분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신익성은 왜 스물다섯 나이 부마의 신분으로 이 정쟁의 가운데로 뛰어들었을까? 당시 신익성은 집권당파로 분류되기는 했으나 당파색이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고, 더욱이 당파의 의견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집권당파의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런데 도데체 왜 나선거야?
 
12살에 부마가 되어 스무 살이 되던 이 해까지 할 일없이 빈둥거려야 했던 신익성은 맥빠지고 무기력한 시간을 살아왔을 터이다. 열불이 터지기도 했을 것이다. 입신양명이 최고의 가치였던 시대에 천재로 태어났으니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초시나 생원시 같은 과거시험에는 당연히 급제했어야 했고, 정해진 엘리트코스로 순조로이 올라가 다음 과거를 준비하고 벼슬자리도 차곡차곡 높여가야 하는데 부마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내가 아닌 남들이 입신양명하는 것을 두 눈뜨고 바라만 봐야 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22년 8월 2일 편에 이렇게 쓰여 있다.
‘동양위 신익성이 죽었다…..그는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고…문장과 필법이 모두 뛰어났다…다만 그가 성품이 조용하지 못하였고…..”
丁巳/東陽尉 申翊聖卒。 翊聖, 文貞公 欽之子也。 尙宣祖大王女貞淑翁主, 尙氣節, 善談論, 文章、筆法皆絶人。 在昏朝, 不參廢母庭請。 及反正後追崇、講和之議起, 而翊聖皆竭力排之。 其後竟以斥和, 被拘瀋陽而還, 士論多之。 但性不恬靜, 且有營産之誚, 人以是病焉。
 
기개와 절조가 높았지만 성품이 조용하지 못했단다.
기개와 절조는 높지만 성품에 좀 문제가 있던 천재란 말이다. 
 
그러니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비마마를 쫓아내자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망발이란 말인가'했을 성싶다. 안 그래도, '되도 않는 역모론이나 꾸며낸 자들이!' 뭐 이랬을 터이다, 근데 사실은 자신도 바로 그 당파에 몸담아 놓고서는.   
 
기개와 절조가 높았던 것은 후일 그의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636년 중국에서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신익성은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면서 임금 인조 앞에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칼로 위협하며 반대한다. 심지어 전쟁 후 청나라의 임금이 자신의 공덕을 기록하는 비석을 세우라 했을 때 인조 임금이 이를 신익성에게 쓰게 하는데 "삼전도  비문을 속히 인쇄하여 청나라에 보내야 폐단을 면할 수 있다….. 전문(篆文)은 신익성으로 하여금 쓰게 하라"고 하는데 신익성이 "결단코 병든 몸으로 이 일을 담당할 수 없습니다”고 버티며 쓰지 않았다. 인조실록 17년 6월 25일. 26일 편의 기록이다.
 
1643년, 죽기 1년전에는 55세의 나이에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동자라는 명목으로 다섯 명이 여진족의 청나라로 잡혀갈 때의 그 다섯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국의 부마가 포함된 이들을 '청나라의 관원은  칼을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한 채로 구금하였다'고 인조실록이 전한다.
 
그의 기개와 절조는 우리의 생존과 자존을 위한 기개와 절조라기 보다는 대국 명나라에 대한 의리가 더 컸으니 아쉽기는 하다. 어쨌든 우리 역사에도 이런 치욕이 어디 한 둘이랴.   
 
 
나이 스물 다섯의 기개높고 절조있던 부마는 역모사건에서 살아남았다.
12살 때부터 들었던 ‘동양위 대감’이란 소리는 좀 못 들으면 어떤가, 별 탈없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하루 아침에 삭탈관직당하고 귀양가고 유배가고 죽고 집안이 몰살당하고, 오늘은 내가 역적을 취조하지만 언제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역적으로 죽게될지 모르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다 본 신익성은 곧바로 두 번째 역모사건이 터지자 소양강으로 간다. 첫번째 역모사건이 있은지 5년 후, 인목대비가 폐모된 그해 가을인 1618년 팔월 보름이다.  
 
 
 
'가을빛' 이 시는 전체가 8구로 되어있고, 한 구가 5자로 되어있는 오언율시다.  
전체가 8줄로 되어있고, 한 줄에 한자 5자씩 들어가는 형식에 맞춰 쓴 시라는 말이다.
이제 이 시의 셋째, 넷째 줄을 다시 본다. 
 
‘평생 낙엽 따라 다니자니
희끗한 머리에 가는 세월 애석하네’
 
처음 이 시를 대할 적에는 ‘평생을 가을낙엽 보며 한량으로 놀았다’고? 싶었는데 뭔가 내 마음에 이제 복잡한 심정이 든다. 심란하게 들린다. 지금껏 따라 다닌 것이 계절이 바뀌면 발치에 깔리는 '낙엽'이란다. 그 '낙엽'따라 다니다 머리가 희끗해 져버리고, 가는 세월이 아깝다 한다. 처음 느꼈던, 그저 한량의 말로 치부하지는 못하겠다.
 
왕권과 신권의 문제, 강력한 왕권과 강력한 집단권력간의 긴장과 투쟁은 역사의 어느 시기나 그저 그 모습을 달리한 채 있어왔다. 과거에는 대부분은 피로 정리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형식적 정치권력의 교체로 정리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집단권력, 즉 당파의 이익추구는 그 기본으로 그때 그때 당시의 현안을 통해서 권력과 이익을 지켜내고 확대해 나갈 뿐이다. 신익성은 여기에 발을 푹 담궈보았다. 그리고 죽다 살았다.
 
 
 
1618년 8월 보름 신익성이 배를 타고 소양강으로 들어가 이 시를 지을 때는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역적의 수괴가 된 두 번째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허균은 1618년 8월 16일 의금부에 체포되어 8월 24일 역모혐의로 한양 서쪽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한다. 아니 능지처참형보다 더하게 죽임을 당한다. 역모사건이면 고관대작들과 무장들이 줄줄이 잡혀오고 고문당하고 유배가고 사약받고 죽고 그러지만, 이 역모사건에서는 처형된 이들이 허균 외 4명 뿐이다. 남대문에 붙은 흉서를 처음 보았다는 유생, 허균집 여종의 남편, 외가의 친족, 그리고 하급무관 하나 이렇게 넷이 모두이다. 시집간 두 딸은 살아남았지만 그의 아들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이런 조직으로 역모를 꾸몄다고?
 
법무부 장관쯤 되는 형조판서를 직전에 했고, 대통령 비서실이나 국무총리실 정도에 해당하는 좌승지, 우승지, 의정부 우참찬, 좌참찬을 바로 마치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이가, 정부의 요직이란 요직은 다 거치고, 대국 명나라에도 그 문명을 떨치는 이가, 지금도 고관대작의 자리에 있는 이가 겨우 하인 정도 넷 데리고 역모를 꾸몄다고?
 
뭐 이런 역모가 다 있을까?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니까, 목적을 가진 어느 힘있는 세력이 '그 놈이 역모를 했습니다'라고 주구장창 떠들어 대면 그렇게 된다니까, 그러면 죽일 놈이 된다니까. 우선 죽이면 되는거야. 그래놓고 버스는 우리끼리 타고 출발하고 띵까띵가 재밌게 놀고 부귀영화 누리고 이게 중요한 거지. 걔네들은 후대 임금이 기분좋아서 '너, 억울했구나, 복권이다'하고 이미 죽어 뼈만 남은 이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그 후손은 찾으려 해도 이미 다 죽인 걸 아는데 찾긴 누굴 찾겠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우리편 후손들이야 정 필요하면 '아, 그때 미안했습니다' 한 마디하면 되는 일, 버스는 이미 수십년 전에 떠난거야. That's none of my business!  
 
역모사건이 터지고 허균이 의금부에 체포될 때 신익성이 '우연히' 소양강으로 배타고 나갔는지 어쨌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죽다 살아난지가 언제라고 또 역모사건이 터지니 차라리 부마가 아니라면 당파의 거두가 되어 뜻을 통괘하게 피어나 보고 영화를 누리든지 죽든지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라면 그저 입닫고 귀막고 눈막고 조용히 있을 테니 이 아수라장이 날 피해 간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당파에 몸담고 정쟁에 자기 목소리를 내어온 자에게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기나 했을까.
 
허무했을까?
오늘 아침이라도 갑자기 앞에 죽음이 다가올 수 있다, 어찌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허균은 신익성보다 19살이 많다. 바로 한발 앞에서 나아가며 당시 양반 사대부가문의 최고가치였던 '입신양명'이 무엇인지 신익성에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주고 있던 사람이다. 허균은 신익성이 부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걸어갔을 길을 지금 한발 앞서서 완벽하게 걸어가고 있는 ‘같은 천재’였다. 그런 이가 역모의 수괴로 체포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어찌 모를 수 있었을까.
 
정말 '어느 날 아침'에 고문을 당해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고 그것도 모자라 저자거리에서 사지가 찢겨 나가 죽고 천재가 들어있는 몸의 윗부분은 몸과 따로 되어야 하는 꼴이 될 것을 어찌 짐작할 수 없었을까.          
 
‘개인 날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게 보이고, 가을 풍광이 눈 가득 어여쁘게 들어오고, 그리고 비틀거리도록 취하고 싶었다는 마음’을 4백년 후의 후대사람이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화려한 술상보다는 소박한 술상’으로 취하고 싶다는 마음도 그대로 느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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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의 한시 한 수를 보다가 어떤 이이기에 이렇게 읊었을까 하여 시작했는데, 지식에 해당하는 부분이야 전부 인터넷에 널린 것을 줏어다 꿰면 되고, 번역 또한 벗이 다해 입에 넣고 먹기만 하면 되게 해주었다. 그러니 이를 제외한 내가 쓴 부분의 글이란 것은 그저 마구잡이로 쓴 글이다.
 
선대의 이 한시는 깊은 울림을 느낀 최고의 한 수로 내가 꼽는다. 나의 글은 잡문이지만 선조의 글은 내게 빛이 나는 문학이라는 말이다. 행여나 마구 쓰는 나의 글투로 인해 이 멋진 한 수의 격조가 떨어질까 두렵다. 
 
심심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지난 주부터 안심심해졌다.
코로나 이후로 먹고사는 직업이 아주 한가해져 돈은 없는 한량급으로 내려앉았다가 문득 보니 다시 바빠졌다. 먹고사는 일은 예전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갑자기 심심하지 않게 되었다. 더우기 마님께서 한국생활을 즐기시느라 바쁜 틈을 타 뒷뜰에 내 방을 만드는 일을 감히 벌였는데, 주말에 틈틈히 하려니 이게 영 진도가 잘 안나간다. 마나님이 오셨을 때는 무조건 낙장불입이 되어야 한다. '그만해! 도데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거야?'라는 말을 해도 아무 소용없게 만들어야 한다. '기가 막혀서 참!'이라고 웃고마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 
틈틈히 친구도 만나고 술도 한 잔 하고 아, 왜 이렇게 갑자기 바빠진거야....
 
오늘 이 글을 끝내려 했는데 고만 한 번 더 해야 한다. 아 모르겠다. 그냥 하는 거지 뭐.           




<영 심심하신 분들이 읽으시라고, 가을빛 4>

4백년 전의 시를 읽다 흥이 일었습니다. 그 흥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신익성은 1588년에서 1644년 사이, 쉰 여섯 해를 살았는데, 그가 ‘가을 풍광’ 또는 ‘가을 빛’이라 이름붙여진 이 시를 쓴 것이 1618년이니 제가 끄적인 이 글은 그의 생애 중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반, 십년 정도의 시간입니다.
 
조선 왕조로는 선조임금과 광해 임금시절입니다. 이 짧은 기간에 두 번에 걸친 역모사건이 있었고, 그 극적인 삶으로 인해 현대의 한국에서 수없이 많은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던 인목대비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조선왕조 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 바로 이후의 시기이며, 쿠데타로 광해 임금이 교체되었던 인조반정으로 이어진 시기입니다.
 
이 시대에도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격동의 시대에 한 국가를 운영해 나갔던 인물들, 한 나라의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인물들,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들, 권모술수와 당쟁을 일삼았던 인물들, 부와 권력을 가졌던 이런 인물들은 모두 우리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그 중에서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이 혹 있습니까?
저는 ‘태종태세문단세….’로 시작하는 역사를 배웠고, 다행이 열심히 암기해서 대학도 가고 했기에 왕이름은 기억합니다. ‘선조, 광해군, 인조’
그리고 옛적 한국에서 한 미모한다는 탤렌트라면 모두 주연은 한번 맡아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드라마도 많이 만들어졌기에 ‘인목대비’ , ‘영창대군’의 이름도 기억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이 시를 쓴 ‘신익성’조차 이번에 처음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우리,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는 바로 이 시기의 많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허균, 허난설헌, 도산 윤선도, 동의보감의 허준, 이런 이름들입니다.  
 
앞의 글에서 이름을 든 허균, 그는 당시의 고관대작이었기에 후대에 기억되기 보다는, 심지어 그가 그랬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릅니다, ‘홍길동전’이라는 한글소설 한 편 때문입니다. 그의 누이 ‘허난설헌’은 겨우 스물 여섯 해를 살았지만 그의 사후 중국에서 출판된 시집으로 후대에까지 그 빛나는 이름을 남깁니다.  도산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와 같은 그의 문학으로 후대의 추앙을 받습니다.  그는 초급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이던 시절 인목왕후 폐비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다가 과거 시험 응시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까지 당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역사의 한 귀퉁이에 간신히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명의로 우리가 기억하는 ‘허준’은 선조임금이 죽자 유배를 가고 거기서 동의보감을 저술합니다.
 
제가 무식하지는 않다해도 분명히 유식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정도 밖에 모르니 그렇지 않습니까.  임금이고 고관대작이라도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역사의 앞에 서서 세계를 이끌어 나간 것은 분명 이들이고 이들로 인해 인간의 역사는 늘 진보해 왔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그 인간의 세계를 아름답고 풍부하게 또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게 만들며 시간의 제약을 넘어 존재합니다. 그래서 문학과 음악과 그림은 몇 백년이 지나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1618년에 씌어진 이 시 ‘가을빛’은 ‘5언율시’라는 형식에 맞추어 쓴 한시입니다.
모두 8줄로 되어있고, 한 줄에 5자의 한자가 들어가는 형식에 맞추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번재, 네번째, 여섯번째, 여덟번째 줄의 끝자는 반드시 일정한 발음법칙에 따라 비슷한 소리를 내는 글자만 골라서 써야합니다. 이 글자들을 ‘운자’라고 합니다.  
한시는 이렇게 엄격한 형식적 제약에 맞춰 내면의 정서를 펼쳐내는 문학입니다.
 
정신이 다 사납습니다.
이런 제약속에서 시를 써야 한다고? 이걸 어떻게 쓰라는 거야? 저는 처음 들을 때 이런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말도 안된다고 말입니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 이 ‘운자’에 해당하는 글자를 누가 불러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이런 시를 짓는다는 겁니다.   
이 시가 한시가 아니라 아무런 형식적 제약없이 그냥 현대어로 씌어진 시라고 할지라도 뛰어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客自牛川起   (객자우천기)
江從月峽穿   (강종월협천)
生涯隨落葉   (생애수낙엽)
鬢髮惜流年   (빈발석류년)
霽日傷心麗   (제일상심려)
秋光滿目姸   (추광만목연)
翛然成小飮   (소연성소음)
一醉任欹顚   (일취임기전)
 
나그네 우천에서 출발하는데
강이 달빛 따라 골짜기를 뚫었네
평생 낙엽 따라 다니자니
희끗한 머리에 가는 세월 애석하네
개인 날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고
가을 풍광 눈 가득 어여쁘네
초연히 소박한 술상 내어다
비틀거리도록 한 바탕 취하리
                                           (번역 임휘철)
 
 
[천, 년, 연, 전] …. 어떻습니까? 이 네 글자가 발음상 뭔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이 글의 제목 ‘가을빛’은 번역자가 붙인 제목입니다.  
신익성은 이 글의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고 제목이 있을 자리에 그냥 ‘우천이라는 곳에서 밤에 [운자]를 받아 읊었다’라는 뜻의 ‘차우천야음’ (次牛川夜吟)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숙부와 함께 갔다고 했으니 숙부께서 운자를 던져주고 ‘시를 읊으라’했을까요, 아니면 숙부께서 먼저 시를 짓고 그 시의 운자를 가지고 신익성이 이 시를 썼을까요? 아니면 그저 운자를 정하고 읊은 것일까요? 어느 것인들 무어가 중요하겠습니까. 그저 시리도록 아름다운 글을 썼으면 됬지요.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였기도 했는데, 신익성이 나이 삼십에 머리가 희끗해졌다 해서 제가 말했지요
“근데 이 싯귀가 좀 이상해. 이거 쓸 때 나이를 따져보니 딱 서른 살인데 평생 낙엽 따라 다녔다고 하잖아요.
뭔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평생을 가을낙엽 보며 한량으로 놀았다는 것 같은데 뭔 고민이 있다고 나이를 따져보니 겨우 삼십인데 벌써 머리가 희끗하다고? 그 나이에 가는 세월이 애석하다고여? 별 웃기는 인간 다 보겠네.”
 
이제 저는 제 경망함이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이런 삶을 지나온 선대의 사람이 그 절박함을 이리 뛰어난 문학으로 탄생시켰는데 아무리 잠시잠깐이라도 그딴 허튼 소리를 내뱉었으니 부끄러워 얼굴을 못들겠습니다.
 

신익성
신익성의 초상입니다.


4백년 전의 사람의 초상이 전해져 오는 것은 드문 일 같습니다.
쉰 여섯의 세월을 살았으니 저 초상속의 얼굴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오십 중반입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팔십이나 구십은 되어 보입니다. 당시의 인간수명 정도나 양반가 대감마님의 외모가 어떠해야 한다는 어떤 기준같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얼굴은 한 인간이 살아온 과정을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나이 이십대 중반에 머리카락의 색깔이 하얀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백발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혹 다른 사람이 그런다면 몰라도, 인간의 평균 수명이 팔십, 구십이 되어가는 현대의 세계에서 사는 자가 그런 지 주제도 모르고 나이 삼십 신익성의 희끗한 머리를 시비걸었으니 아무튼 저는 이 한시 한 수로 부끄러움에 두 번 얼굴을 붉히고, 강이 달빛따라 골짜기를 뚫는 모습을 눈감고 그립니다.
 
근데 이 시를 음미하며 내 마음속에서 들을 때 혹 함께 할 음악이 뭐 없을까 고민하여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럴 땐 좀 유식해지면 좋겠다 싶습니다. 아는 것이 많으면 이럴 땐 참 도움이 되겠다 싶은데 아닌 걸 어쩌겠습니까. 음악을 잘 아시는 분이 슬쩍 좀 도움을 주시면 아, 정말 고마울 것입니다. 
 
이 글 '가을빛'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