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목요일 아침,
어제 묵었던 산내의 준수네 집을 마중나온 관영과 함께 나섰다.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반에 걸쳐 같은 꿈을 꾸며 살았고 이제는 나이 육십이 넘어 산골에 집을 짓고 고요히 산다.
지난 우리의 삶은 저 지리산 자락마냥 깊고 깊은 무엇을 우리의 가슴속에 한처럼 쌓아 두었을까?

함양군 산내면 지리산 자락에서. 저 밑에 지리산 실상사가 있다.
이 집 마당과 앞 집의 사이로 지리산 둘레길이 지난다.
그 마당에 삼십여 분 쯤 앉아 있으려니 그 길을 걸어 지나가는 이들이 몇 있다.
저들은 이 길을 지나며 여기 사는 이들과 지금 그 마당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내가 누구인가에 관심없이 그저 지나간다.
혹 ‘아, 이 사람은 지리산 둘레길에 좋은 집을 짓고 살고있구나?’ 이런 생각 정도는 할까?
지나치는 그들 앞에 앉아있는 우리가 어떤 생을 살아와 지금 여기 앉아있든 그건 그 사람의 삶과 지금껏 아무런 연결도 없었고,
그러니 그저 그 정도로 무심히 지나간다.
우리의 삶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던
간에
이십 대의 젊었던 시절 이후 그렇게 사십 여년이 휙 지나갔고,
나는 지금 그간 아무런 관계도 없던 지리산 자락 여기에 앉아
지금 저 앞을 지나간 길손이 나를 무심히 보고 지나쳤듯
그렇게 나도
이 산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세 집이 어울려 땅을 사고 집을 지었다.

왼쪽 집의 오른쪽 창이 있는 공간은 세 집을 위한 공동공간이다.
간단한 부엌시설, 식탁, 그리고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오른쪽 집의 이층 창을 통해 내려다 보이는 지리산은 일품이다.
이곳 산내면은 귀촌지로 손꼽히는 곳인가 보다.
면 인구 이천에 귀촌인구만 6백여명, 지난 2년전 방문 이후로도 여전히 귀촌인구가 많이 늘었다.
이쁜 집들을 짓고 함께 모여 산다.
관영과 함께 여기저기 걷다 아침 빨래를 마당에 널고 있던 한 곳의 집주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집주인이 “관영샘, 커피 한 잔?” 하며 잠시 안으로 들어와 쉬었다 가란다.
관영은 커피를, 나는
차를 부탁했는데
요새는 커피를 잘 안마시기도 하지만 나는
한국의 믹스커피문화가 영 반갑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마음 속으로 후회했다.
2년 전 한국방문길에 한국에서는 믹스커피를 많이 마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후로는 ‘커피 한 잔하실래요?” 하는 가벼운 말에는 “아뇨, 괜찮습니다”라고 은근히 거절해 왔는데,
아, 오늘 예쁜 집의 예쁜 주인장께서 정말 향기로운! 커피를 내려
왔던 거다.
나도 커피할 걸…..후회했다.
물론 차도 좋았다.
저녁 서울약속을 맞추려면 길을 조금
서둘러야 했다.
산내를 떠나 남원, 구례를 거쳐 하동으로 가는 길을 잡았다.
구례에서 화개를 거쳐 하동으로 가는 길은 위로는 지리산, 아래로는 섬진강을 둔다.
백두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금강, 설악, 태백,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데
섬진강은 한반도를 뻗어 내려온 이 백두대간의 남쪽 종착역 지리산의 서쪽과 남쪽을
그간 수고했다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흐른다.
저 위쪽의 작은 옹달샘에서 발원해 흘러 내려오면서 모이고 모여 강을 이루며
지리산을 끼고 도는데
구례에서 하동까지 80리 길을 마을따라 굽이굽이 흐른다.

(이 섬진강 이미지는 drone & landscape가 제작한 '하동여행'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 https://youtu.be/JNv9K2PTG2U)
한강이나 금강, 낙동강과는 달리 사람의 간섭이 덜해서 굽이굽이 작은 마을과 작은
들을
그저 자연스럽게 지나거나 스며드는데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른다.
그래서
그럴까, 내게는 그 느낌이 여느 강과는 사뭇 다르다.
내게 북한강은 비장한 강이고, 금강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강이다.
새벽 짙은 안개 속으로 흐르고 그 강물에 여윈 손을 담그면 산과
산이,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신비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강이 정태춘의 북한강이고,
신동엽의 금강은 읽기 시작하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고 뛰기 시작하는 강이다.
우리들의 어렸을 적 / 황토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 파랑새 노래를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 소리 뿌리면서 /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 거리며 /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 그 노랜 침장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이
섬진강 이미지는 drone & landscape가 제작한 '하동여행'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 https://youtu.be/JNv9K2PTG2U)
그런데 섬진강은 호남땅의
아픈 역사가 어찌 강을 따라 흐르지 않겠냐만은
봄이 오면 예쁜 이와 손잡고 꽃보러 가고,
달 떴다고 문득 전화하다가 '달떴다고 전화하는 놈이 니가 첨'이라는 소릴듣고 시를 쓰는,
사람사는 정내미를 떨쳐낼 수 없는 소박하기만 한 강이다.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 꽃 보러 간
줄 알아라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봄날')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김용택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특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
(김용택의
'섬진강')
유홍준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에서 섬진강은 특히나 해질녘 노을
물들 때가 정말 아름답다고 하니
저문 섬진강에 하루의 일을 마친 삽을 씻고
저물어가는 삶을 기대어 사는 꿈을 아직도 꾸고 있다.

구례군 문척면 화양마을 .
이 집 안주인은 미술을 전공했으나 젊은 시절 그림을 그려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제 집 옆에 작은 미술관(왼쪽 건물)을 지어놓고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한단다.
섬진강처럼 산다.
경남 하동 '박경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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