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 가는 길
2017년 10월 11일 아침, 통영으로 가기 위해 서울 강남의 고속버스
터미널을 떠나자 비가 가벼이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1시 통영에 내리면 오후
2시 30분에 출발하는 연안 여객선을 타고 추도로 들어갈 예정이다.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면서 가볍게 흩뿌리던 비는 조금씩 굵어졌고 고속도로의
왼쪽으로 줄지어 선 야트막한 산들의 능선은 비구름에 덮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의 창 밖으로 보이는 가을 풍경은
아름답다.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 하다. 하늘은 더욱 짙어지는 먹구름으로 그
풍경화의 윗부분을, 그 가운데는 짙은 초록으로 우거진 숲과 산이 늘어서서
자리잡고, 아직 추수하지 못한 논의 나락 황금빛은 풍경의 아래부분을 밝게
그려내고 있는데, 이 풍경속에는 빨간 지붕의 집이 정점을 찍듯 자리해 있다.
하지만 슬금슬금 짙어지는 비구름들은 하늘과 선명한 경계를 짓던 산의 능선들을
부드러이 감싸 안아돈다.
산과 하늘은 원래 하나일까? 빨간 지붕을 가진 집 앞의 황금색 나락도 곧
추수가 끝날 것이고 그러면 저리 선을 긋듯이 산과 땅이 경계를 짓지 않고
두리뭉술해 지리라. 이래도 저래도 지금 이 풍경은 아름답다, 하늘과 산과 땅이
나눠져 있어도 아름답고, 합쳐져도 아름다우리라.
가는 길 내내 보인 산들은 수목으로 풍성했다. 모두 멋진 숲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 수십년간 산들이 이리 풍부한 숲을 이루었다니 놀랍고 기쁘다. 아직도
나에게는 한국의 산은 헐벗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었는데 그렇게 헐벗은 곳은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산은 초목으로 풍성했다.

고속버스는 여전히 빗길을 질주했고 그 옆으로 한줄로 이어지며 같이 달리던 야트막한 산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세
겹, 네 겹으로 겹쳐지더니 그 산세가 장중하고 깊어지고 있있는데, 고속버스는
지리산의 위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경남 함양이다. 여기서 길은 갈라져 왼쪽으로 가면 경상도 대구로, 오른쪽으로 가면 전라도 광주로,
그리고 계속 나아가면 산청을 지나고 진주를 거쳐 남해로 나아간다.

고속버스가
함양부근을 지나고 있다.

지리산에
다가가면서 산세가 깊어지고 있다.

함양부근
진주를 지날 때는 손으로 장단을 맞추며 진주난봉가를 응얼여야 제맛이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 시집살이 삼년만에 /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 얘야, 아가
며늘아가 / 진주낭군 오셨으니 / 진주남강 빨래가라.”
저기 보이는 저곳이 진주남강일까?

차는 통영으로
들어서고 있다.

통영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통영의
환영은
격했다.
통영의 버스터미널에서 이상경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산청에 사는데 여기서 우리와 만나 함께 추도로 들어가기로 했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상경형과 나는 내가
스물 세살 때 서로 만났다. 80년대 말쯤인가 형이 운영하던 출판사를 접은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으니 족히 30년이 훌쩍 지난 것같다. 반가워 반가워 서로
포옹을 하고, 붙잡고 붙잡고 얼굴을 서로 들여다 보고 있자니 기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리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긴 했어도 그간 인터넷을 통해
글을 주고받고 있었고, 또 언젠가는 막걸리집에서 한잔 거나하게 하고 한 곡조
뽑는 동영상도 보내 온 적 있으니 마치 늘 보고 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만
같다.
그리 내 얼굴을 한참 보던 상경형이 눈물을 글썽인다.
“병진이 머리가 이리 하얗게 백발로 변한 걸 보니 내가 눈물이 다 난다.”
통영의 환영은 참 진하구나.

통영
여객선터미널 앞 시장에서의 점심식사
통영의 연안여객선 터미널 앞에는 시장이 있었다. 시장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통영시장이었던가? 여길 들어가 점심을 먹는데 통영의 환영은 또한번 진하고
격했다. 점심으로 시킨 이걸 해물탕이라고 해야 하나? 음식을 담은 그릇 자체도
컸지만, 그 안에 담겨나온 해물은 그걸 먹기위해 그릇안으로 숫가락을 넣을 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온갖 조개류로 꽉 차있었다.
정말로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담아 줄 수 있을까.
더우기 그릇당 하나씩 들어있는 큰 고동은 젓가락을 고동과 껍질 사이로 살짝
찔러넣은 후 고동을 콕 찔러 당겨내면 된다고 친절히 안내문이 써져 벽에 붙어
있었는데 우린 모두 고동을 꺼내 먹는데 실패했다. 추도 섬사람인 다른 일행도
이걸 못하더라. 어떡할까, 먹을 것이 너무 많은데 이건 그냥 버릴까? 하지만
안먹고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 주인장 분께 부탁을 해보기로 했다.
인상이 아름답고 친절하기 그지없는 주인장 (우린 그 분을 주인아줌아가 아니고
아가씨라고 부르자고 내심 쉽게 의견일치를 봤다)에게 고동살을 못꺼내겠다고
얘기했더니, 아! 이 친철한 미소와 말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주인분께서는 정말
1초도 안걸렸다. 그저 단 한번의 손놀림으로 고동을 쏙 빼내어 주었다, 그것도
고동의 똥은 쏙 빼고 살로만.
통영의 시장은 감동스럽구나. 난 이래서 재래시장이 좋아, 사람들이 어울려 분주히 살아가는 모습이 이리
진하잖아. 수북이 담겨나왔던 음식은 소주 한 잔과 곁들여 하나도 남김없이 나의
기쁨을 위해 모두 온전히 쓰였다.

통영 여객
터미널

추도행 여객선
이순신장군
그리고
윤이상 기념음악당
통영에서 추도는 1시간 거리다.
여객선터미널을 떠난 배는 윤이상 기념음악당을 오른쪽으로 지나치고 왼쪽으로는 한산도, 오른쪽으로는 다시 미륵도를
끼고 수많은 섬들 사이를 질주한다.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그 아름다움을
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이곳이며, 한산도란 이름만 들어도 한국사람은 누구나
아는, 이순신장군의 그 임진왜란 전장터가 바로 여기다.
임진왜란은1592년 선조 25년 (토요토미
히데요시
とよとみ ひでよし豊臣秀吉가 1590년 일본전국을 통일하고 2년 후)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은 1597년
종전협정의 결렬로 남해에 진주중이던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공한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정유재란에서 조선의 수군은 궤멸했고, 이순신은 이미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역적죄인 기망조정 무군지죄(欺罔朝廷 無君之罪)’, '국가반역죄인
부국지죄(負國之罪)’, ‘원균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한 죄인 탈인지공
함인어죄(奪人之功 陷人於罪)’로 27일간 선조에게 혹독한 문초를 받고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고 있었는데, 이충무공 전서에 의하면 선조는 이 때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면서 이렇게 교지를 내렸다고 한다.
“왕은 이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방패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재앙을 거두지 않으사 흉악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서 다하고 말았도다. 이후로 바다 가까운 성읍은 누가 지키겠는가? 이미
한산을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尙何言哉 尙何言哉 상하언재
상하언재)......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
선조가
임란때 한 일을 생각해 보건대, 이는 왕이 신하인 이순신에게 살려달라고 보낸
편지다.
이순신없는 조선수군을 이미 궤멸시킨 일본수군은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육군은 조명연합군을 격파하면서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로
진격한다. 이 전란동안 백성들은 전쟁에서 죽거나, 굶어죽거나, 아니면 왜군의
앞잡이 되어 살아남거나 하며 참혹한 고통을 당했다. 대부분의 지방수령들은 왜군이
나타나면 도망치거나 숨기 바빴다.
왕은 전쟁이 나던 해에 광해군에게 분조를 만들어 맡겨 놓고는 한양 도읍을 버리고
일본군의 북상에 밀려 북으로 북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국경넘어 명나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그나마 사실상의 거절을 당하고 들어가지 못한다. 왕이 한양을
버렸다는 것을 안 도성의 백성들은 분노해 경복궁, 창덕궁, 장례원을 불태웠다.
유명한 대중소설 작가인 이원호는 그의 소설 ‘난중무사’에서
이 참혹한 전란의 시기를 묘사하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란중에서
당파싸움에 몰두하는 조정과 무능한 임금, 왜적의 앞잡이가 되거나 아니면 전쟁에서
죽거나 굶어죽는 백성들, 지휘관은 전장을 피해 다니면서 이름 없는 의병이 세운
공적을 주워 행재소에 보고하고 승급이 된다.”고 서술한다.
소설에서
의병장 정석영이 우병사 최성연의 진막 안에서 장수들과 모였을 때다.
[숨을 고른 정석영이 말을 이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남은 자식과 손주, 그리고 자원한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치고
싶습니다.”
“……”
“ 이 참상을
겪고 이 땅에서 대를 이어서 살아갈 뜻이 없소이다. 이 땅, 이 왕조에 만정이
떨어졌으나 반역은 못하겠고
왜적이나 치다가 죽게 해주십시요.”]
만정이 떨어진 왕조지만 차마 반역은 못하겠으니, 의병장이 적을 치고 죽겠단다.
실제로 이 당시 의병장 김덕령이 역모에 엮여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살되었다.
이 전란으로부터 360년이 지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3일후, 한국의
대통령은 서울을 사수한다고 시민을 안심시켜놓고는 남으로 내려가 버리고는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넘어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인도교를 폭파해버린다. 이
폭파로 피란중이던 민간인 800여명이 사망했다.
부끄러운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는 것일까?
사실 조금 전에 지나쳐온 윤이상기념음악당은 그 정식명칭이 ‘윤이상기념음악당’이
아니라 ‘통영국제음악당’이다.

통영국제음악당
통영은 예향(藝鄕)의 도시이다.
인구 14만의 도시에 저렇듯 위용있는 음악당이 있는 까닭이 그러하다. 이곳은 수많은 예술인들을 낳고 품었다.
금방 생각나는 이들만 해도, 화가 이중섭이 부인을 그리며 소를 그렸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고향이고, 박완서는 이곳을 조선의 나폴리라고 했다. 현대음악가
윤이상은 늘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1969년 이후 이 땅을 밟도록 허락받지 못해
일본배로 이 앞바다까지 와서 보고 갔다는 그 통영이다. 하지만 통영 앞바다에
이렇듯 멋진 음악당이 있을 수 있는 것 또한 윤이상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실제 윤이상선생을 기리기 위한 통영국제음악제가 이
건물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살아 생전에 그의 방문을 허락치 않았던 조국은 이제
그가 죽고 나서 이리 멋진 건물을 짓고 그의 이름에 기대어 위용을 뽐내고
있으니, 이념이란 것만 섞이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삶이로구다.
배 뒤편으로 거친 물살을 뿜어내며 달리는 여객선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머리카락을
세차게 뒤로 휘날린다. 선조들의 치욕과 현대사에 서린 전쟁과 이념의 아픔을 먼저
기억하긴 했지만, 이곳은 400여년 전 세계해전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승리들을 패배 한번 없이 이루어 내고, 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12척의 남은
배를 이끌고 333척의 일본수군을 대파하여 전쟁을 마무리지어 냈던 위대한
명량해전의 장소, 조국과 백성을 죽음의 참상에서 구해낸 위대한 장군의 삶과
죽음의 전쟁터였음에 숙연해진다. 지금 내 눈에는 이 수많은 섬들 사이사이를 열
두척의 배를 이끌고 휘달리던 장군과 군사들의 함성이 골골마다 일어나 오는
듯하다. 용맹함으로 적선을 무찌르던 선조들의 모습이 이 세찬 바람으로 나를 맞는
듯하다. 나는 400여년 전의 선조들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분단과 이념의 질곡에
정면으로 부딪치고자 했던 한 위대한 현대음악가를 회상하며 그를 위로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지금 내 조국의 위엄과 자랑스러움이 서려있는 아름다운 바다,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을 달리고 있다.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

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
물
반
고기
반
통영 앞바다에는 570개의 섬이 있고 추도는 이들 섬 중에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이걸 찾아보고는
섬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다도해라고는 하지만 몇 십개도 아니고
일 이백개도 아니고 무려 570개라니 !

추도는
하루에 두번 여객선이 운항하는 아주 작은 섬이고 빈 집이 즐비했다.

추도 여객선
선착장. 통영을 출발한 배가 추도에 닿았다.

추도
여객선 선착장
이곳에 나를 부른 재규선배도 빈 집을 하나 구입해 수리를 하고 휴식처처럼 쓰고
있다. 원래는 선배 부부가 노년에 들어와 살려고 구입했는데 아직 형수님의 동의를
얻지 못한 모양이다, 하하. 이 집 부근에 대 여섯채의 집이 더 있는데 두
채는 마찬가지로 육지사람이 구입해서 수리를 한 후에 주말이나 그들의 휴일날
사용하는 모양이고, 몇 채는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재규선배는 통영에서
반찬거리며 안주거리며 술 등 시장을 잔뜩 본 후에 날더러 며칠 푹쉬고 가라고
한다. 물론 낚시로 잡아올리는 녀석들은 따로고 말이다.
선배, 섬에서 사흘을 보낼 준비가 다 되어있습니다.

추도
샛갯마을의 재규선배 집. 그 전망은 일품이었다.

추도 샛갯마을의 재규선배 집. 그 전망은 일품이었다.

김재규 선배, 이상경 선배,
유병진과 오경석


던져둔 통발에 반찬거리 들었나 확인하러
가다
여장을 풀고는 바로 낚시를 나갔다. 집앞이 낚시터다, 괜히 기분이 막 좋아진다.
재규선배는 낚시라는 것은 처음인 내 집사람, 거의 같은 수준인 나, 그리고
상경선배, 이 셋의 낚시를 돕는 일만 하겠단다. 먼저 내 집사람을 위해
낚시대를 꺼내 펼치고 미끼를 끼고 밑밥을 던지고, 그리고 낚싯줄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 낚시줄이 바다에 떨어지는 걸 보고서야 “제수씨 잘하네요”하고는 내게
돌아섰다. 이제 나를 가르칠 차례다.
하지만 난 낚시를 못했다. 재규형님이 내게 돌아서는 순간 집사람의 비명이 터졌기
때문이다.
“어머,
어머, 어머”
생전 처음 낚시한다는 여자가 낚시줄을 넣은지 그야말로 몇 초만에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수면위로 올라온 고기는 희안한 광경을 연출했다. 낚시줄에 달려 하늘로
올라온 녀석은 낚시줄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초짜 낚시꾼으로 인해 하늘을 빙빙
돌다 간신히 바위 위로 날아왔다 싶으면 공중에서 다시 바다 위로 돌아가고
낚시줄에 매달린채 이리저리 흔들흔들 춤을 춘다. 초보 낚시꾼은 낚싯대 붙들고
서서 “나 어떡해, 나 어떡해”만 연발한다.



이 여자는 이렇게 하고서도 한 시간 동안 열
다섯마리인가를 낚아 올렸다. 재규형님이 땀을 뻘뻘 흘렸다. 매번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기를 낚시줄을 잡아채 내려야 했고, 미끼를 다시 끼워 줘야 했고,
제대로 던지게 도와야 했고, 끊어진 낚시바늘을 다시 달아줘야 했고, 심지어
걱정되니 물에 안빠지나 옆에서 지켜야 했다, 아이고 성님, 고맙소.
우린 낚시를 던져넣고 삼십초 동안 입질이 없으면 미끼가 없어진 것이라고 농담을
했더니 그게 정말이었다. 잠시 입질이 없어 낚싯대를 올려보면 미끼가 실제로
없었다. 여긴 물 반 고기 반의 바다다, 뭐 이런 바다가 다 있나 싶다.
이날 잡은 고기는 저녁반찬으로 구워 푸짐하게 먹고, 남은 것은 얼려 섬을 나갈
때 가지고 나갔다.
하늘 반 별 반
‘물 반 고기 반’이란 말은 알지만, ‘하늘 반 별 반’이란 말을 내가 쓸 줄은
참으로 몰랐다. 어둠이 내리는 바다를 보고 있으니 저 앞으로 줄지어 서있던
섬들이 점점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어둠이 다 내리니 섬이 있던 자리에 불빛만 한
두개 반짝인다. 섬에서 나는 불빛인지 바다에 떠있는 배의 불빛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러고 맥주를 마시다 문득 우리 말했다 “여기 별이 많이 보이지
않을까?”
하늘을 올려다 본 우리는, 아니 나는 하늘보다 별이 더 많다고 믿었다. 온
하늘에 누군가가 아주 작은 알사탕처럼 반짝이는 별을 뿌리고 또 뿌리고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밤하늘 검은 색보다 반짝이는 별이 더 많다고 믿었다.
“와아,
하하하, 하늘 반, 별 반이다!”
국민운동
고스톱
섬에서의 둘째 날은 종일 비가 왔다.
우리는 그래서 국민운동을 했다. 아침을 먹고 국민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고 국민운동을 하고, 저녁을 먹고
국민운동을 했다.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자가 있으면 여지없이 술잔이 바로
주어졌다. 하루종일 국민운동을 하는 열정은 술도 다 떨어지게 하고 안주도 다
떨어지게 했다. 선착장에 하나 있는 가게에 가면 캔맥주가 있고 소주가 있단다.
뭍의 가격의 세 배를 받는다는데 국민운동의 과정에서 무례하게 돈을 따 이익을
챙기는 이의 앞에는 반드시 술잔을 드리밀어야 한다는 절박함은 세 배의 가격도
흔쾌히 감수하게 했다. 다른 이의 앞에는 백원 짜리, 5백원 짜리 동전을
있게하고, 내 앞에는 지폐로 된 돈이 놓여있으면 좋겠다는 강렬한 욕구는 너나없이
우리의 전투력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우리의 얼굴은 굳센 의지로 물들어 있다.
고스톱을 해본 것은 한 15년 정도 된 듯하다. 하지만 이 놀이를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치는 방법도 다 알고, 룰도 잊어버리지 않았고, 이 판에
적용되는 새로운 룰에 합의하는 과정도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남해의 외딴 섬 이
집에는 백원, 오백원 짜리 고스톱용 동전이 미리 수북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 고스톱은 국민운동임에 분명하다.
오늘 하루, 종일 비오는 한려수도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울 인사동에서의 대취
추도에서 모두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서울에서 모여 풀었다.
사실은 내가 추도 방문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최연선배는 원래 일정대로 날 버려두고 추도로 내려갔었고, 그래서
추도에서 함께 하지 못했던 이들은 이렇게 서울서 모여 회포를 풀자 했다. 인사동
술집을 순례했고 나는 대취하고 말았다.
(유강근,
최연 선배, 김종박과 함께) 서울 인사동에서 (Oct 20,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