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千祥炳,
1930
~
1993)
시인.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한국인
부모에게서
출생했으며,
부모를
따라
귀국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으며,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와
고문을
겪었다.
이때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5백원,
1천원씩
받아
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으며,
천상병
시인
자신도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
그때의
처참한
수난을
천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고문)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1970년에는
술에 취한 채 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행려병자로 처리돼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지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천시인이 죽었다고 생각, 유고시집 <새>를 발표하였다.

새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1987년, 김종구 한국일보
기자 촬영)
1972년 절친한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과 결혼식도 올렸다.
20여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쌀을 사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이 태평했던 천상병.
막걸리 한병, 담배 한갑이면 천하에 부러울게 없었던 그는 의지할 아내와 눈을 부칠
방까지 해결되고나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행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1993년
4월
28일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상병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아내는 그의 대표 시 ‘귀천(歸天)’의 이름을 딴 찻집을 인사동에 냈고,
2010년 76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