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는 이야기    [List]  
Feb 19,  2011 | 친구 사진방에 올라온 이재숙의 사진을 보고
   

나란 인간의 기억은 참으로 유한하고 짓궃다.

수십년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다니며 이리저리 뒤섞어 놓는다.
졸업을 못하고 대학을 나와버린 것이 83년이었고,
물론 그때부터 10년도 더 지나서 졸업장은 받았다.
그 후 한 15년, 20년 내가 있었던 세상은 그 전과는 아무런 연결이 없는 새로운 세계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관념과 사상을 가지고, 새로운 일속에서 사는 동안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속에 엇갈린 두개의 세계 사이에서, 그건 참으로 다른 두 개의 세개였다, 어느듯 옮겨가 그 세월을 살았다.

더 있을 것같지 않았던 공간과 시간의 이동이 그 후에 또 한번 찾아왔다.
벌써 17년 정도 지났다.
모든 것이 상호관련속에 필연적으로 엮여있으며 진보해 나간다고 믿던 내게, 현실속의 나는 늘 단절과 건너뜀으로 보이는 것을 선택했고 그 이유를 설명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다른 세계로 옯겨와 살고 있음을 과거와는 달리 늘 인지하면서 살아왔는데,
이번에는 그 전의 세계가 있었음을 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문득 어느 날 내게 존재했던 과거가 현재의 나에게 한꺼번에 몰려왔다.

수십년을 기억속에서 완전히 잊고 살아도 의식조차 못했던, 아니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살아나며 그리워졌고 그래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뭔가가 갑자기 무척 그리워졌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힘들게 하는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했다.
뭔가 과거의 것을 그리워한다는 감정은 지난 세월을 되집어 내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속에서 어떤 것은 너무 혼돈스러워 실소를 짓고,
또 어떤 것은 마치 오늘 일처럼 떠 오르기도 해
인간의 기억이 유한하고, 취사선택적임을 깨닫는다.

여기 살아도 발달한 문명 덕으로 한국의 소식을 쉬이 접할 수 있는데,
가끔은 신문지상이나 텔레비젼에 나오는 인사들이 나를 당혹하게 했다.
내가 분명히 저 인간하고 내가 지나쳐 왔던 어떤 세계에서 함깨 했는데
그게 어느 시간대의, 어느 공간에서, 어떻게 얽혀서 살아왔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는 거다.
같이 걸쳐 있었던 관계속이라 짐작되는 이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는데 모른다는 거다.

"내가 도데체 저 인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내가 저 사람하고 뭘 같이 했던 거지?"
인간의 기억이라는게, 나도 인간이니까, 이런 건가 보다.
아니면 나의 망각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든지.
하물며 더 오래된 기억은 그렇지 않은가?

어릴 적 고향친구들을 찾아 인터넷상으로 만난게 2009년 말이였으니,
그간 그 시절을 의식조차 못하며 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 내어 그리워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기억이 저 깊은 나의 내면속에 오래 오래 침잠하다
자신을 부르는 작은 소리에 스스로의 생명을 일깨워 일어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학, 고등학교 시절이면 한 40년 쯤에 다가가는 세월같다.
그 기억속에 어떤 광경들이 흐릿 흐릿 여러 것 지나가는데
어떤 것은 선명히 붙잡을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어린 시절 분명히 어느 시간대에 즐겁게 같이 놀던 한 동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치 신기루처럼 흐릿하다.
언제인지도 흐릿하고, 어디였는지도 흐릿하고, 누구였는지도 흐릿하다.

스스로 살아난 기억이라는 것이 이제 와서 내게 보여주는 자신의 공간과 시간과 존재가 다 흐릿하니
그것이 존재했던 실체였는지 허상이었는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제대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못하는 처지에
지금의 나의 한 편을 기어이 이루어 내고야만 그 기억이란 놈을 이제는 다시 쳐낼 수는 없으니
불편한 점이 있기는 해도 그냥 그 존재를 인정해 주면 될 일이다. 

존재는 알지만 관계는 알려주지 않던 기억의 행동이 위의 사람이라면
관계는 알지만 존재를 알려주지 않던 기억이 밑의 사람이다.

어떤 때는 다 지워놓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주 낡아 흐릿한 사진을 내민다.
어떤 때는 사진을 새로 현상해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해도 뭐 흉될 것은 없다.
내게 기억은 악동기질이 있는 장난꾸러기같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란 존재가 이번에는 몇 장의 사진을 내밀고는 웃는다.
"어때?"
나도 미소지어 주었다.
"그래, 너 잘났어,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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