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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나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소설가 신경숙의 번역)
오리지널에 가깝게 된 번역을
다음의 가사를 보면, 이 곡이 어떤 시대상황 속에서 태어나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다.
카타리니행 기차는 언제나 8시에 떠나는군요.
11월은 영원히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우오조(ouzo)를 마실 때 우연히 만났지요.
당신은 무슨 비밀인지를 간직한 채
밤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기차는 8시에 떠나지만,
당신은 카타리니에 혼자 남겠지요.
가슴에 칼을 품고 안개 속에서 시계를 주시하며
5시에서 8시까지...
*우오조(ouzo):그리스지방의 anise라는 열매로 맛을 들인 음료
그리스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마치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는 듯이 빼어 닮아있다. 식민지 지배, 제2차 세계대전과
독립운동, 이어진 냉전시대속에서 약소국이 겪어나가는 외세간섭, 좌우이념갈등, 현대국가의
성립을 둘러싼 갈등과 내전, 군사정권의 등장과 민주주의의 압살, 이 기나긴 과정에서
민중이 겪어야 했던 잔혹한 피해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국의 현대사를 보는 듯 했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우수에 젖은 이
곡은 독일점령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17살의 레지스탕스였고, 1940년대
내전시기에 좌익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갖혀 고문을 당했고, 1960년대 군사정권에
대항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여 그들에 의해 작곡, 지휘, 연주, 심지어 그의 음악을 듣는
것조차 금지당했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lkis
Theodorakis)의 곡이다.
그리스의 근현대사를 잠시 보자.
그리스 왕국(1832-1924)
시대 : 1821년에서 1832년까지
근대 그리스의 혁명주의자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그리스 독립 전쟁을 수행하였고, 나중에 유럽 열강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얻으면서 '군주제 공화국'으로서의
그리스 왕국이 성립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이다.
아나톨리아(오늘날
터키 영토에 해당하는
반도半島를 말한다. 이전에는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렸다)의 한구석에서 나온 소 군후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이윽고
동로마 제국 등
남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를 포함한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을 동시에 정복하면서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제국인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쇠퇴하여 그 영토는 다른 나라에 점령되거나 독립하여
1923년 마침내 마지막에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로부터 새롭게 건국되어 나온
국민 국가인
터키 공화국이 되었다.
그리스-터키 전쟁 (1919-1922)
: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후인
1919년에
그리스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인
그리스-터키 전쟁이 발발하였다. 영토확장을 위해 그리스가 일으킨 전쟁이었으나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그리스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왕정이 무너졌고, 터키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리스 제2공화국(1924-1935)
:왕정이 무너지고 성립되었던 제2 공화국은 사회
갈등, 군부의 정치 개입, 몇 차례 쿠데타 시도,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터키와의
전쟁에 따른 주민 교환(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그리스에 들어온 150만 난민문제, 이어진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피폐해지고,
1935년 다시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군주정으로 복귀한다.
군주정으로의 복고(1935
- 1941)와 제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의 그리스
점령시기 (1941-1944) :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1941년 5월 중순에 그리스는 세 추축국인
나치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의
합동 점령하에 놓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독일은 그리스의
농산물 대부분을 착취하고 어선의 출항을 금지하여 나라는 심각한 빈곤에 빠졌다. 이런
결과로, 또 영국의 봉쇄 조치로 해외 원조가 끊기자 1941년과 1942년에 대규모
기아가 발생하여 수십만 명이 죽었다. 이렇게 추축국의 점령기는 그리스 민간인들의 끔찍한
시련을 안겨다주었다. 300,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굶주림으로 죽었으며, 이보다 수
천명 더 많은 사람들이 보복으로 살해되었고, 그리스 경제는 황폐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리스 본토의 산지에서는 몇몇
저항 운동이
생겨나 1943년 중반에 추축국 군대는 주요 도시와 연결 도로만 통제하는 형편이었으며,
"자유 그리스"가 산지에 세워졌다. 가장 큰 저항 조직인 '인민
해방 전선(EAM)'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끌었고
1944년 10월 그리스는 해방되었다. 이 외세의 점령시기에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저항 운동이 그리스의 국내외에서 거세게 일어났는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세력들은
대부분 좌파였는데 가장 유력한 세력은
인민해방전선(EAM)이
있었다.
그리스의 해방과 내전(Greek Civil War)
:
영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정부군과
그리스 공산당(KKE)의
군사 조직으로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민주군'(ΔΣΕ)이 싸운
내전이다. 1944년 10월에 독일군이 철수하자 좌우 연립 정부, 즉 인민해방전선
성향의 장관 여섯 명이 입각한 국민 통합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연립 정부는 몇 주
되지 않아 해체되고 민족해방전선 인민해방군이
아테네와
테살로니키를
제외한 그리스 전지역을 장악했다. 1944년
12월 3일에
결국 격렬한 내전이 벌어졌고 영국군이 이를 진압했다. 제 1차 그리스 내전이다.
제 2차 그리스 내전 :
(1946-1949) : 제1차 내전 후에
1945년
2월에 열린 회담에 따라 인민해방군은 무장해제되고
1946년
3월 그리스 총선에서 국왕파가 다수 승리했고
1946년
9월 국민투표로 그리스 국왕
파블로스 1세가
다시 권좌에 앉게 되었다. 같은 해 1946년, 그리스 공산당이 통제하는 게릴라 군대가
정치와 병참 면에서 당시 새로이 건국한 북쪽의
사회주의
국가들(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리스
민주군'으로 조직되고,
1947년
말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 북쪽 산악지대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이콧했던
1946년 선거에서
선출된 그리스 정부를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고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시대 당시, 유럽에서 소련의 세력을 봉쇄하려는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의 전략적 중요성을 생각해 이들 나라에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을 지원했고, 그
결과 좌파는 세력을 잃고 49년 10월 내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1947년 공산당을
불법화한 이후 그리스는 철저한 반공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정쟁(政爭)이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 군부 쿠데타
등이 일어나 강압적인 군사정권이 등장하는 등 서구민주주의의 발원지인 그리스는 오랜
세월동안 군사정권아래 놓이게 되는데, 3년 간의 내전으로 양측 모두 5만 명이 전사하고
50만 명의 그리스인
난민이
발생하였다.
전후 그리스(1950-1973) :
1952년부터
1963년까지 그리스는 보수 정당이 집권하였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1967년 4월 예정된 선거를 눈앞에 두고 우익 대령의 무리가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대령들의
정권"을 세웠다. 시민
자유는 억압되었고, 특별 군사 재판소가 설치되었으며 각 정당은 해산되었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정적들이 투옥되거나 그리스의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다.
1973년 이후 :
1974년 그리스는 터키과 전쟁 상태에 이르렀고, 이에 터키는 키프로스 섬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1947년 이래 불법이었던 공산당이 합법화되었다. 국민 투표로 군주제가
폐지되다.
1981년 1월 1일 그리스는 열번째로
유럽 공동체(오늘날의
유럽 연합)에
가입한다. 1981년 10월 18일 의회 선거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2004년 3월 선거에서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은 신민주주의당에 패배하였고, 2007년
9월 선거를 통하여 신민주주의당이 다시 의회 다수 정당이 되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lkis Theodorakis)는 17세가 되던
해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트리폴리스가
이탈리아에 점령되자, 점령군 이탈리아와 독일에 저항하는 인민해방전선(E.A.M.)에 들어가
레지스탕스로서 활동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리스가 영국의 내정간섭으로 좌우로
나뉘어 내전(Greek Civil
War, 1944-1948)을 겪게
되는 기간 중에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적색분자로 체포되어 마크로니소스(Makronissos) 섬의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다리뼈가 부러지고 턱뼈가 깨지는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첫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1960년대 여전히 왕정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공산주의자의 선동으로 규정하여
탄압하였다. 때마침 평화시위행진 중이던 EDA(좌익민주연합) 의장 그리고리우스
람브라키스(Grigoris Lambrakis)가 정부의 계획적인 테러로
사망하면서 시위는 격화되었다. 테오도라키스는 1963년 람브라키스 민주청년운동(Lambrakis
Democratic Youth) 단체의 대표로서 민주화 투쟁을 리더하였으며,
1964년에는 피레우스(Pireus)에서 통일좌익당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1967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군사정권(Greek
Junta)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천 명의 반체제저항세력(주로 지식인과 대학생)을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그리고 좌파세력과 함께 민중들이 즐겨부러던 이른바 저항음악을
금지하는 군법령(13호)이 발표되었다. 그 중에는 테오도라키스의 작곡, 지휘, 연주,
심지어 그의 음악을 듣는 것조차 금지했다.
1968년 그는 펠로폰네스(Peloponnese)의
고립된 마을에서 연금되었다. 그곳에서 외부세계로 저항의 메시지와 악보를 내보내기도
하고, 그리스 시(詩)를 가사로 한 가곡집을 작곡하기도 했다. 후에 오로포스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세계 여러 나라의 저명인사들이 그를 위한
구명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제적 압력
덕분에 드디어 1970년에 파리로 망명하였다. 1990년에는 1964년과 1981년에 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콘스탄틴 미초타키스(Constantine Mitsotakis)
신민주당 정부에서 장관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의 제5공화국 시절(1981 - 1988,
1979년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이 대통령에 있었던 시기를 말한다)
그의 음악은 한국에서도 금지되었다. 당시 국내 라디오에서는 그의
음악들을 즐겨 방송해주었는데 그의 정치 성향이 알려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음악들은
금지곡이 되었고, 5공 시절에는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음악이 삭제된 채 방송되었다.
80 년대 중반에는 그리스 출신의 샹송 가수이자 테오도라키스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던
조르주 무스타키가 방한했을 때는 자신의 앨범에서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곡들이 모조리
삭제된 데 대해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참고한 곳 :
바람구두의 쓸쓸한 풍소헌
박종호의 책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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