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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창부수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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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의 건망증은 어찌 이리 도를 더해갈까?

오늘 아침은 오경석이 서두르고 있다.
10시에 첫 예약환자가 있는 날이라 그리 서두를 일이 없는 아침이다. 더우기 석재가 요즘은 방학이라 예약환자의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곤 했는데, 아침 일찍 환자한테서 전화가 오는 것 같았다. 바로 오겠다는 환자를 달래서 9시 30분에 약속을 잡았다고 하면서 서두르고 있다. 30분 일찍 나가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아침시간에 마음이 어디 그러나? 
근데 cellular phone을 잊어 버리고 안 갖고 나갔다.
유병진 왈, "이 아줌아 정신이 없구만..."

오경석은 셀폰은 꼭 챙긴다.
아침 일찍이나 저녁 늦은 시간에 환자에게서 급한 연락이 오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를 위해서 clinic으로 오는 전화를 cell phone으로 연결해 놨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처럼 좀 늦게 나간다거나, 낮에 석재를 데리러 가야 할 일이 생기는 경우를 위해서도 그렇고, 심심하거나 힘들거나 할 때 서방님과 수다를 떨기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도야 뭐 늘쌍 있는 일이라 별 일도 아니다.
가다가는 "아 참, 지갑 안 가져갔지" 하고 다시 돌아오고, "나, CD 안 가지고 갔어". "아까 편지 보낼 꺼 있었잖아!" 뭐 이러면서 두 세번을 들락날락하고, 심지어는 집 열쇠도 안가진 채 문을 다 잠그고 나간 경우도 여러번 여러 번 있으니까 말이다. ^^ (그 다음에 어떻게 했냐구요?^^ 그 챙피한 걸 어떻게 다 말해요, 난리를 폈지요 으흐흐흐)

그날 오전, 열심히 노가다를 하는 유병진... (컴퓨터 네트웍 일이라는 게 노가다지요, 뭐). 잠시 쉬는 틈을 타서 전화를 한다. 근데 오경석이 전화를 안받는다.
신호만 가고 영 통화가 안된다.
"환자 보고있나 보구나...." 괜히 섭섭....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에 cell phone으로 전화가 오면 못받으니까.

오후 3시쯤일까 유병진이가 다시 전화를 한다.
뭐 꼭 전화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그저 하는 거지요.
근데 또 안받는다.
"오늘은 환자가 많은가 보네? 영 전화를 못 받네?....."
"점심이나 제대로 챙겨 먹고 일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근데 두 번이나 전화걸은 걸 알 텐데 왜 전화를 안해주는 거야?"
또 괜히 섭섭......

유병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퇴근길이라 Freeway는 지독히도 막힌다. 그때 전화가 왔었다. 6시는 좀 안된 시간이었던 것 같지, 아마?
누구한테 온 전환지 힐끗 보니 "Cli..n..." 이렇게 보이는 거다.
"Cli...."라는 글자는 보이는데 뒤가 잘 안 보인다. 그 뒤에 'n' 자가 있는 것 같고. 
누굴까?
"Cli.e.nt?"
엥? Client 가 전화를 했는데 그곳 전화번호가 나오든지, 아니면 내가 입력해놓은 이름이 나와야지 어떻게 "Client" 라고 나올 수가 있지? 거 웃기네....?
잠시 머리가 돌아간다. 혹 방금 일하고 온 회사에서 전화를 했나?
이상한데?
뭐 어쨌든 빨랑 받아야지.

푸하하핫.
오경석이가 전화를 한 거였다.
"지금 어디야?"
"응, 한 10분쯤 있으면 집에 도착할 거야"
"응, 나도 마지막 환자 끝났어. 한 10분쯤 있다가 출발할 께"
뭐 이런 얘기가 왔다갔다 하면서 난 그만 머리를 흔든다.  이건 말도 안돼.
세상에!!!  지 마누라 전화번호를 "Clinic"이라고 입력해 놓았고... 그것도 1번에...그리고 수도 없이 전화를 걸고 받고 할 때 맨날 그걸 쓰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드디어 마누라가 전화를 안 갖고 나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참, 당신 전화 안갖고 나갔었지"

아, 돌아오는 말이 걸작이다.
"응, 그래서 집에 전화를 해서 석재한테 당신 전화번호를 물어봤지"
.........!!!!

"아직도 내 전화번호 못 외워?"
"응!"
"그럼 석재 전화번호도 못 외우겠네?
석재번호하고 내 전화번호의 뒷자리 4개가 같거든.
"응, 석재 것도 몇 번인지 몰라^^"
"좀 외워라, 외워, 그러다 급하게 전화할 일 생기면 어떡할라고 그래"
........

이렇게 얘기하는 유병진이도 사실은 오경석 Cell phone 번호를 아직 못 외운다. 어쩌다 전화를 잊고 나간 날은 아무데도 연락을 할 수가 없다. 전화번호를 한 개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 전화번호도 못 외워서 잘못 가르켜 주곤 한다. 어떤 때는 누가 집전화가 몇 번이냐고 물어서 가르켜 줬는데, 며칠 있다 만난 그 사람이 다시 확인을 한다. 
"그 집전화 'No longer Service'라고 나오던데????"  
"에이, 그럴 리가요, 나 조금 전에도 걸었는데???"
나야 단축키만 눌러서 전화를 거니 내 집 전화번호가 몇 번인지 몰라서 아무 상관이 없거든.

아, 이러고 산다.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지만, 정말 슬픈 건망증의 top은 이거였다.
일하러 간 유병진이가 오경석과 전화로 계속 얘기를 하다가 주자창에 도착을 했다. 그날 따라 짐이 많아서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왼쪽 어깨에 메고, 옆자리로 돌아가서 운전석 옆의 자리에서 무슨 책이며, 자료뭉치 등을 꺼내 오른쪽 팔짱에 끼고, 왼손에는 또 뭐를 들고, 아마 그게 커피였지?
그러면서 전화는 왼쪽 어깨에 끼고 계속 오경석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대충 다 꺼냈다 싶어 차문을 닫으려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거야.

"내 Cell phone 어디 갔지?"

차문을 열고 그 자세로 다시 차를 뒤진다. 아무리 찾아도 전화가 안 보인다. 전화를 차에 놓고 내려서 다시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전화를 갖고 간 기억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오늘은 그게 미리 생각이 났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근데 아무리 찾아도 안보인다. 왼쪽 어깨의 가방은 자꾸 미끄러 지고, 오른쪽 겨드랑이에 잔뜩 끼워 놓은 물건들은 떨어지려고 그러고, 차 지붕에 얹어 놓은 커피는 잊어버리고 갈 까봐 신경이 쓰이고, 근데 아무리 찾아도 전화가 없는 거다.
그리고는 결국 왼쪽 어깨에 끼고 통화중이던 cell phone에 대고 이렇게 말해버렸다.
"여보, 내 Cell phone이 안 보여, 이거 도데체 어디 간거야?"

잠시 말을 않고 있던 오경석이가 알려줬다.
아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정말 헷갈렸겠지. 그리고는 금방 상황파악을 했겠지.

"지금 당신 전화하고 있는 거는 뭐야?"

우리 이러고 삽니다. 건망증도 살아가는 재미라고 그러기에는 넘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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